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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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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Aug 01. 2020

이건 벌레인가 모빌인가

남루한 일상 재정비

바쁜 하루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가족들은 자고 있거나 어딘가에 앉아서 각자 못다 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날은 좀 달랐다. 가족 중 한 명이 일어서서 가만히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며 뭐하냐고 물으니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가 벽을 봤다. 그냥 벽이었다. 얼굴을 벽 가까이 가지고 갔다. 벌레 한 마리가 몸을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부지런히 천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길이에 얇은 두께를 가졌고 노리끼리한 색상에 얼굴 부근에는 갈색으로 콕하고 찍어 놓은 것처럼 생긴 벌레였다.


벌레를 못 잡아서 보고만 있었다길래 얼른 휴지를 뜯어 벌레를 잡았다. 누군가는 잡아야 하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얇은 휴지 너머 내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부피감 때문에 머리카락이 쭈뼛섰다. 날씨가 덥고 습해서 택배 상자나 곡물에 있던 알들이 부화하나 보다, 라는 내 말에 이어서 엊그제는 신발장 쪽에서 봤다는 말이 들려왔다.


신발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높이에 있는 벽을 훑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벌레가 천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으악! 졸음이 아주 멀리 달아나 버렸다. 벌레 네다섯 마리가 모빌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번데기화를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신발장을 방금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방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자다가 눈을 뜨면 정말 모빌처럼 내 눈 앞에서 여러 마리가 매달려 돌고 있을 것 같다는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테이프를 가져와 벌레를 가둬두고 신발장과 연결된 벽을 쭈욱 살폈다. 눈으로는 다른 벌레의 흔적을 찾느라 바빴고 손에 든 테이프에서는 접착되지 않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느라 분주했다.


다음 날, 벌레의 정체를 찾기 위해 검색을 했다. 가족들은 이미 '쌀벌레'라고 단정 짓고 있었지만 여태 쌀벌레가 노골적으로 벽을 타고 다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어딘가에 은밀하게 숨어있다가 성충이 되면 나타나는 존재로만 여겼기에 이건 필시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 결과 쌀벌레가 맞았다. 벌레의 등장은 별로지만 이미 알고 있는, 그다지 해롭지 않은 정체라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상식을 얻었다. 쌀벌레는 나방이었다. 진짜 이름은 화랑곡나방. 쌀벌레의 정체가 나방이었다니. 왠지 찝찝하게 느껴졌다. 통통하고 부숭부숭한 털이 많고 가루를 흩날리는 날개를 이리저리 퍼덕이며 다니는 나방의 모습과 쌀벌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쌀벌레가 조금 더 징그럽게 다가왔다.


쌀벌레의 정체를 깨달은 날 양말 뒤꿈치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퇴근하고 양말을 벗을 때 발견했다. 뒤꿈치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구멍이 커져서 꿰맬 생각도 못하고 안녕해야 했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물때가 껴서 군데군데 거뭇하고 빨간 반점이 찍힌 세면대와 바닥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청소한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더러워졌을까, 바빠서 중요한 공간에 신경을 못쓰고 있었구나, 구멍 난 양말도 모르고 신고 다니고, 일상을 좀 돌아봐야겠네,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주말을 맞이해 오랜만에 화장실 청소를 했다. 문을 닫고 락스를 물에 풀고 환풍기를 틀었다. 수도꼭지, 벽, 바닥, 변기, 화장실에 놓인 대야 등을 수세미와 청소용 솔로 문지르고 헹구고 한 번 더 문지르고 헹궜다. 잘 지워지지 않은 부분은 치약과 샴푸를 사용해 거품을 내 문질렀다. 빨갛고 검은 점들이 하얀 거품과 함께 사라지는 마법을 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묵은 때를 벅벅 문지르며 내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도 빡빡 힘줘서 문질렀다. 화장실 청소가 끝나면 그것도 없어지거나 희미해지길 바라면서.


물이 티와 바지를 적셨다. 몇 번은 작게 튀더니 물 각도를 잘 못 조절해서 물이 왕창 튀어올라 축축해졌다. 다른 때 같으면 습하고 땀나는 와중에 물이 튀어서 화가 났을 텐데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은은한 락스 냄새가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이날은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아무 이유 없이 몇 번이나 화장실 불을 켜 청소한 공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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