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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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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Aug 12. 2020

아낌없이 주는 우산

우산에도 영혼이 있지 않을까?

우산을 쓰고 외출을 했다. 흰 바탕에 알록달록 발바닥 무늬가 있는 우산이었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꽤 오랜 기간 가지고 있던 우산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우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별 이상이 없지만 군데군데 녹이 슨 우산 살이 지나가는 부근마다 진한 갈색이 묻어있었고 손잡이는 연한 회색으로 바래져 있었다. 모양은 낡았지만 아직 쓸만했고 비가 오면 얇든 굵든 빗방울의 크기와 상관없이 나와 내 소지품을 지켜주는 기능은 멀쩡했기에 버리지 않았다.


우체국까지 가는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다. 우산대를 잡은 손이 빗물이 천에 닿을 때마다 작게 진동했다. 우체국에 도착해 우산에 묻은 빗물을 살살 털었다. 볼일을 보고 우산을 쓰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도 빗방울과 바람이 우산을 흔들었지만 우산은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횡단보도에 잠깐 멈춰 섰을 때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우산 속을 봤다. 우산 살이 닿는 곳마다 녹이 묻어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우산과 새 우산과 접이식 우산과 장우산에 대해 생각하며 돌아왔다. 건물 처마라고 해야 할까? 건물 입구에 뾰족 튀어나온 부분에 들어와 바깥을 향한 뒤 우산을 접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산이 착! 하고 오므려졌을 텐데 우산이 훌렁-거렸다. 어딘가 가벼워진 낯선 느낌에 우산을 다시 폈다. 우산 머리와 우산 살이 분리돼 서로 따로 놀고 있었다. 손으로 우산 대를 잡고 흔들 때마다 천과 철이 각자 움직이는 진동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자동차를 오래 타다가 바꿨는데 멀쩡하던 차가 바꾸는 날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는 인터넷에서 본 일화 하나가 생각났다. 오래된 차라 길거리에서 갑자기 멈췄으면 큰일 났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보냈다던가. 차도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를 알아봤듯이 내 우산도 오랜 기간 함께한 나를 알아봐 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비로소 안전히 도착했다는 걸 알고 갈길을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여태 멀쩡하더니 이러기야? 하는 생각도 들면서 충분히 고장 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왔다 갔다 할 때는 온전히 자기 모습을 유지해주고 있었구나! 하는 기특한 생각도 들었다. 우체국을 가는 길이나 우체국에서 나올 때 고장 났다면 쫄딱 비를 맞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다.


철이 삐걱될 정도로 오래되었는데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전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말로도 고맙다고 뱉었다. 재활용되어 좋은 제품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우산 끝 부분은 나중에 활용하기 위해 뽑아냈다. 끝까지 아낌없이 주고 가는구나. 사진을 다시보니 우산에게 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잘 버텼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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