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시 생각해봐도
비슷한 시기에 상추와 깻잎에게 연락이 왔다.
상추는 카톡으로 내 이름만 부를 뿐 말이 없었다. 왜? 답장을 하니 그제야 용건이 적힌 카톡을 길게 보냈다. 결론은 무언가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였다. 상추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내 시간 중 일부를 할애해야 했다.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평소보다 더 잘 수 있는 시간을 쪼개서 일찍 일어나느냐, 더 자느냐의 문제로 이어졌다. 별로 힘든 일은 아니지만 아침 시간을 할애해서 무언가를 들어줘야 한다니 고민의 시간이 살짝 길어졌다. 10분 정도 저울질을 하다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그리고 상추의 부탁을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카톡을 보냈다. 이렇게 해주면 되는 거지? 상추가 답장을 보냈다. 응.
깻잎의 카톡은 간단했다. 나 대신 이것 좀 해주라. 부탁할게. 미안해. 미안하다니. 내가 아직 깻잎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깻잎은 나에게 전혀 미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깻잎은 미안하다고 했다. 깻잎의 부탁은 상추의 부탁보다 훨씬 더 많이 내 시간을 써야 했고 약간 품이 드는 일이었다. 상추의 부탁이 단순히 복사하는 일이라면 깻잎의 부탁은 복사한 뒤 코팅하고 모양에 맞게 가위와 칼을 사용해 자르는 일이랄까. 깻잎이 보낸 카톡을 보고 있는데 내가 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없을까를 저울질하기보다 이 공손한 부탁을 거절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이런 부탁을 해서 내가 더 미안하다고 올까, 그것도 못해줘? 라며 처음과 다른 말투로 올까, 알겠다며 체념할까 호기심이 일었다. 손가락을 잠깐 허공에 머뭇거린 뒤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그리고 깻잎의 부탁을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카톡을 보냈다. 이렇게 해주면 되는 거지? 깻잎이 답장을 보냈다. 응. 고마워.
깻잎의 용건을 처리할 때 상추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내 시간과 노력을 썼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 좋았다는 표현보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될 깻잎의 기분을 생각하니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깻잎은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 미리 '미안해'와 '고마워'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마워'와 '미안해'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가보다.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 나의 노력과 수고와 할애를 알아주기를 바라나 보다. 어쩌면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과대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깻잎은 아주 조금 미안해하고 아주 약간 고마워했을 뿐인데 나 혼자 거대한 착각에 빠져서 분에 넘치는 열과 성을 다했을 수도.
그래도, 다시 생각해봐도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표현해주는 깻잎의 연락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