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없었던 영상, 우리가 결말을 선택한다
과거에 제롬.F.데이비스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그는 독자가 제시된 선택지에 따라 책장을 앞뒤로 넘겨 읽는 소설 <밴더스내치>를 집필하며 LSD 같은 항정신성 약물을 복용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아내가 팩스라는 악령에 씌어 자신에게 약물을 투여한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으며, 매 선택에 따라 무한한 우주가 평행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결국 아내의 목을 긋고 말았다.
영화는 가상의 소설 <밴더스내치>를 모티브로 한 게임을 개발하는 19살 소년 스테판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는 작가 데이비스를 천재라 생각하고, 그의 소설이 게임이 된다면 훨씬 더 재미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또 우상이던 게임개발자 콜린 리트먼의 코치를 받을 기회도 얻는다. 게임 발매까지 남은 시간은 단 3개월. 스테판은 밥을 거르고 밤도 새가며 자신의 한계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결국 그저 그런 게임을 개발한다. 아니면 아버지를 죽이고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가 된다. 아니면 자신이 정부에 의해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면 어머니를 잃기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 이런 ‘아니면’들이 모두 영화의 결말이다.
영화 <밴더스내치>에는 총 8개의 엔딩이 있다. 주인공이 어떤 시리얼을 먹을지, 어떤 음악을 들을지를 결정하며 (실제로 화면에 제시되는 선택지를 클릭한다!) 영상이 시작된다. 주인공인 당신 (스테판) 은 게임회사 터거소프트에서 제안하는 공동개발에 참여할지를 선택한다. 순진하게 제안에 응하면 게임 개발이 엉망으로 되고, 결국 다시 제안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그때에는 언뜻 같은 영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내용이 다르다. 마치 현재의 기억을 가진채 과거로 돌아간 듯.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이지만 실제로 전체 영상의 길이는 약 5시간이다.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며 혼란은 가중된다. 하지 않았던 선택은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시간을 초월해 과거로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든 결론은 늘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그제야 깨닫는다. 엔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우리 인생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이런 디스토피아적 발상과 기법은 기존의 <블랙미러> 시리즈의 메시지를 확장시킨다. 마치 유발 하라리가 그린 불운한 미래를 보는 듯 하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유발 하라리의 짧은 글
이 독특한 형식의 영상을 감상하면서 재미와 함께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았다. 선택에 따라 무수히 결과가 변하는 포맷을 영상보다 게임에서 접해왔기 때문일까. 프린세스 메이커부터 위처까지, 순간순간 선택에 따라 엔딩이 바뀌는 게임은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영상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첫 시도다.
이 새로운 형식이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는 다음 작품들에 달려있고 생각한다. 형식과 조응하는 내용이 아닌, 완전히 다른 주제의 이야기로도 과연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까. 또 찰리 브루커의 <블랙미러> 시리즈가 아니라면 이 포맷을 어떻게 활용할까. 벌써부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