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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민 Sep 30. 2020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유년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

 해질 무렵의 하천을 걸으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6학년 2학기 때 분당 미금으로 전학 온 나는 딱히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에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부모님도 딱히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방학 내내 '비뢰도'나 '룬의 아이들' 같은 한국형 판타지 소설에 빠져있었다. 몇 달간 먹고 자고 앉아서 책만 읽다 보니 체중이 점점 불어 통통을 넘어 뚱뚱에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내심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한 손에는 내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나와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여동생의 손을 잡고 저녁마다 집을 나섰던 걸 보면.


 우리는 반강제로 매일 집 근처의 탄천을 한 시간씩 걷고 뛰었다. 당시에는 운동을 정말로 싫어했기 때문에 매번 죽는소리를 하며 억지로 끌려나갔다. 뛰다가 힘이 들어 집에 가자고 징징거려도 어머니는 양보하지 않으셨다. '저 다리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 알겠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다리가 눈 앞에 당도하기만을 바라며 두꺼운 종아리와 엉덩이를 열심히 흔들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살바토레(토토)는 키스 장면으로만 구성된 한 편의 영화를 본다. 정확히는 개별적인 영화에서 키스나 나체 등 외설스러운 장면을 자른 후 그것끼리 이어 붙인 영상인데, 어린 시절 토토에게 영사기술을 알려주었던 알프레도가 그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제는 거장 감독이 된 그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영화에 집중한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모두가 유년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누군가는 즐겁고 기분 좋은 순간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힘들었다는 표현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지옥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개 너머로 듬성하게 비치는 산봉우리처럼 소수의 일화나 장면만을 기억한다. 마치 살바토레가 성공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떠난 후 30년간 돌아오지 않았듯이, 우리 또한 유년의 기억을 굳이 찾지 않고 오늘을 살아간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해 생생한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이 있다.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나가거나 서랍 속 편지 상자를 발견했을 때, 혹은 명절에 만난 친척들이 나의 흑역사를 가지고 놀릴 때. 그중에는 영화도 있다. 유년을 다룬 영화를 보며 우리는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 지를 깨닫는다.


 윤가은의 <우리들>에서는 방학 동안 특별한 우정을 쌓은 선과 지아가 교실에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은 의외로 흔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막 되었을 무렵, 같이 다니던 친구 중 한 명이 아파트 복도에서 '너랑 나랑 친구라고 생각하냐 병신아?'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분노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있을까. 그는 싸움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 자신과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는 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12년에 걸쳐 촬영했다. 똘망한 눈을 가진 아이가 수염 덥수룩한 청년이 될 때까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 했던 내가 군대에 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길고 천천히 흘렀는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를 어렴풋하게 느꼈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을 보면서는 부모님께 사업을 하겠다며 큰소리치고 플스방만 다녔던 고 3의 내가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똑같은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하루를 통과하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어떤 날의 선택에는 후회가 남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유년은 아름답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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