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2016
영화 <우리들>의 주인공 이선(최수인)의 하루를 따라가다 과거의 나와 자주 마주쳤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시달림을 많이 받는 아이였다. 특히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애한테 자주 당했다.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셌던 그 여자애에게 얼굴을 얻어맞아 멍이 든 적도 있다. 또렷한 기억 중 하나는 현관문 앞에서 나를 심하게 다그치는 어머니. 정말로 화나신 것 같았다.
이유는 이러했다. 우리 집 축구공으로 그 여자애와 같이 놀다가 공을 잃어버리자, 나한테 당장 공을 사 오라고 시킨 것이다. 난 어머니께 공을 사게 돈을 달라고 했고, 어머니는 너무 화가 나셨는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공을 주면서 “이제 나랑 절교야!”라고 말하고 오라고. 거의 눈물을 흘리시며 연거푸 나에게 ‘절교야’라고 말해보라던 어머니가 똑똑히 기억난다. 난 결국 그것도 못하고 또 울었다.
어떤 영화는 마중물과 같이 지난 기억을 길어 올린다.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내밀한 경험담으로 글을 시작한 까닭은, <우리들>을 보고 난 후에 남은 잔상들이 대부분 영화가 아닌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걔는 나에게 왜 그랬을까', '나도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줬을까.'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울림은 신선하면서도 깊었고, 그래서 좋았다. 이 영화는 소녀들의 우정과 갈등을 정직하고 섬세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어른 관객을 각자의 유년으로 안내한다.
윤가은 감독은 입체적인 어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소녀의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부모나 선생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 속 그들은 아이에게 무관심한 부모나 폭력적인 교사가 아니다. 심지어 꽤 괜찮은 어른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영화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건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는 여름방학이라는 특수한 시간 동안 서로를 위하고 공통점을 찾으며 우정을 쌓았지만, 개학 후 그들이 쌓은 우정은 무참히 파괴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등 돌리기와 폭로전은 선과 지아의 마음에 큰 상흔을 남긴다.
영화는 주인공 선의 시선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주변 인물들의 삶과 상처를 고루 담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종종 마주치는 장면이 그렇게 영화가 되었다. 시험에서 2등을 하고선 혼자 엎드려 우는 보라(이서연)의 모습, 부친이 떠나간 빈 침대 앞에서 숨죽여 우는 선의 아버지 등은 짧지만 강렬해서, 한두 컷만으로 영화의 등장인물에게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덕분에 선의 유년기를 담은 이야기가 이내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관객을 휘청거리게 하는 강력한 대사 한 방도 있었다. 선의 동생 윤(강민준)은 아직 상처라는 것을 잘 모르는 천진한 아이만 할 수 있는 말로 어른들을 울렸다. “내가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다시 내가 때리면,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상처쯤은 괜찮고 사이좋게 노는 게 더 중요한 시기. 누구에게나 이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상처가 버거워지면 우리는 몸을 사리게 된다. 나를 보호해 줄 마음의 벽을 견고히 쌓고,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한다.
유년의 기쁨과 슬픔은 기억이라는 하나의 서랍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내’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누구나 각자만의 서랍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선과 지아의 서랍은 남들보다 깊고 어두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둘이 꼭 나중에 같이 바다에 가기를. 튜브 타고 물놀이도 하고 해변에서 맥주도 한잔 하기를. 언제까지나 소중한 친구로 남아, 서로 바빠서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도 서로의 존재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