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라고 가나
결코 안락하다고 할 수 없는 아시아나 항공 이코노미 좌석에서 기지개를 수십 번 켜고 있다. 11시간 동안의 야간 비행이 끝나간다. 잠은 한 숨도 자지 못 했다. 와인을 두어 잔 마셨는데도 소용없었다. 피곤하지만 정신이 말짱했다. 나는 맹수를 만난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것처럼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오은영 박사에 따르면 이렇게 눈을 감고만 있어도 90%는 잠을 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수면부족으로 인한 편두통과 안압, 어지러움을 생각하면 90%라는 숫자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그녀에게 따저묻고 싶다.)
뭐, 괜찮다. 한 시간 후면 시애틀에 도착하니까.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삼십 대 초반 즈음엔 미국을 한번 여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 몇 달 전 어느 금요일 밤, 야근을 마치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쓰러지듯 귀가한 밤이었다. 평소처럼 혼자 술을 마셨다. 그날 유독 고됐는지 나는 정신이 핑 돌 정도로 빠르게 맥주캔을 비웠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다음 달 LA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잠들었다.
다음날 술에서 깨고 보니 아무래도 미국을 혼자 여행하는 건 별로일 것 같았다. 제주도 정도라면 혼자여도 괜찮았지만 미국은 혼자 돌아다니기 부적합하다. 그건 여행이라기보단 여행을 빙자한 정신적 자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이래저래 사람들을 많이 만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근 일이 년은 회사 말고는 딱히 사람들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주말도 보통 혼자 집에서 쉬거나 호수를 뛰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이번 휴가는 혼자 푹 가라앉기보다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두 친구와 마음이 맞아, 날짜를 조금 조정하고 다시 티켓팅을 했다.
행선지를 고르면서 고민이 있었다. 시애틀은 친구(의 친구)가 살아서, 샌프란시스코와 LA는 서부를 대표하는 대도시니까 넣어주고, 대자연도 좀 봐야 하니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도 가기로 했다. 문제는 라스베이거스와 포틀랜드를 둘 다 갈 수 없다는 것. 환락을 위해 지어진 사막 위의 인공도시와 힙스터의 성지 중에 나는 후자를 골랐다. 이 선택을 두고 나의 팀장은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했고, 나의 친구는 ‘너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감성을 한 스푼 덜으라’고 했다. 뭐 어쩌겠나. 이게 나인 걸.
이런 여행은 인생의 특정한 시기에만 가능하다. 떠나기 며칠 전 그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황급히 카메라를 한 대 샀다. 짐벌 카메라 오즈모 포켓 2. 눈에 담기는 타지의 면면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서툴지만 여행 브이로그 같은 느낌으로 짧은 영상도 만들어보기로 했다. 유튜버나 인플루언서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힘이 없을 때, 작은 한 두 개의 영상이 꽤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음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