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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민 Feb 05. 2022

호수가 녹는다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호수가 녹는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얼어붙었던
호수는 녹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추워서 더 울다가
다시 녹았다


김수영 시인의 <풀>에서 풀을 호수로 바꿔보았다. 삶에서 시와 가깝게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충동적으로 시집을 한두 권씩 구매했던 적은 몇 번 있다. 시는 어렵다. 한 때 나름대로 시를 써서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짧은 글을 적었다. 그 무렵 현대시학을 가르치시던 나이 지긋한 교수님과 단둘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은 내 시를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시가 아니다."


그 이후로는 시를 쓰지 않았다. 실망했던 것 같다. 나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서툴지만 창작에 대한 열망이 있는 젊고 어린 24살을 모질게 대한 교수님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가 맞았다. 다시 읽어보면 확실히 내가 쓴 건 시가 아니었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그랬다. 1년 정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지만, 그건 습작도 아니고 작품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애쓰는 이상한 무언가였다.


사실 오늘은 달리기에 대한 반성조의 글을 쓰려고 했다. 겨울이 되고서 달리는 빈도가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얼마  오랜만에 호수에 나가보니, 호수는 이미 흐물거리며 녹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호수가  것도 몰랐는데 벌써 녹고 있다니. 살짝 충격을 받아 그걸 주제로 글을 쓰고자 '호수가 녹는다'라는 제목을 적고 나니 김수영 시인의 <> 생각났고, 그렇게 시를 생각하다 보니 예전에 나에게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그걸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보았다. (페이스북에 박제되어 있고, 무려 8 전이다.)

오늘은 달리기 대신 내가 과거에 쓰고 그렸던 몇 개를 소개하려고 한다.



14년 2월 어머니, 여동생과 일본 여행을 갔다. 비행기 탑승하기 전에 공항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륙을 기다리는 비행기의 뒷모습이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학 시절, 정문 앞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손님이 없는 날에는 카운터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이날은 마지막까지 남은 손님을 몰래 그렸다.


비교적 선명히 기억나는 어느 오후. 인문학관 앞 벤치에 앉아 동아리 회식에 가기 전 잠시 빈 시간에 그렸다. 볕이 참 좋은 날이었다.


법학관 앞이었다. 솔가지를 보다 보니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한번 그려봤다. 하지만 그리면서 깨달았다. 나는 솔가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여태 몰랐다는 것을.


시(는 아니고 그거랑 비슷한 무엇)와 그림을 같이 그린 버전. 이건 그나마 덜 진지하고 우울한 거다. 이불을 팡팡 차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것도 많았다.



8개의 부정적 감정을 주제로 한 시리즈 중 여섯 번째.



누구나 어떠한 시절을 통과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에게 타이포그래피 강의를 들었던 시절이 있고, 하루키에게 힘겹게 빚을 갚으며 재즈바를 운영했던 시절이 있듯이, 나에게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던 시절이 있다. 물론 나의 시절은 그들과 달리 유명한 일화도, 어떤 이론의 근거도 될 수 없다. 하지만 소박한 이야기의 소재 정도는 될 수 있다. 평범한 직장인의 주말 저녁을 의미 있게 채울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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