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정하는 선과 악의 모호함에 대해
개봉하고 나서 3명이서 극장에 봤던 영화 "소리도 없이"
그때 당시에 간략히 적어놓고 올리지 못한 리뷰를 올려본다.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태인’과 ‘창복’.
어느 날 단골이었던 범죄 조직의 실장 ‘용석’에게 부탁을 받고 유괴된 11살 아이 ‘초희’를 억지로 떠맡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아이를 돌려주려던 두 사람 앞에 '용석'이 시체로 나타나고,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영화의 이야기는 평범하다. 그러나 영화는 대단하다. 영화는 많은 메세지와 메타포, 주제를 담고 있지만 이야기의 재미는 전혀 뒤쳐지 않는다. 다른 평론가들의 해석과 달리 나는 이 영화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라 말하고 싶다. 가족의 의미에 대한 주제를 겉으로 던지고 있으나 깊숙히 한발짝 들어가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선이란 기준의 허상을 낱낱히 파헤치는 영화이다. 씬으로 보면 웃기고 코믹한 블랙코미디이지만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무서운 소재의 이야기다. 죄를 짓는지 모른채 죄를 짓는 인간의 잔인함은 배가 되어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하는 행위는 분명 악이다. 시체를 은닉하고 처리해준다. 그 자체는 법적으로 악이다. 그러나 직접 살생하지 않는다. 의뢰를 받은 일을 열심히 할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의 댓가를 받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선이다. 주인공인 창복은 최대한 최선을 다해 시체를 묻어준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고 좋은 방향을 잡아준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고인을 위해 기도해준다. 그리고 집에가서는 본인을 위해 기도해준다. 회개기도.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가면 낮에는 계란을 팔고 시간이 남을때는 시체를 처리한 창복과 태인에게 삶의 가치관을 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동안 자신들이 고수해온 선과악의 경계선을 넘어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괴된 11살 초희를 본의아니게 데리고 있게되면서 초희의 몸값을 받아야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여기서 창복과 태인은 고민하게 된다. 자신들은 직접 범죄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깨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창복은 자꾸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서 태인에게 열심히 기도를 안해서라고 투정 부린다. 그러면서 어쩔수 없이 초희를 태인과 태인의 어린동생과 함께 지내게 하면서 초희의 몸값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동안의 이런 장르(?)와는 궤를 달리 한다. 기존 영화가 답습하고 있는 클리쎄를 타파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영화 전체적이 부분에서 표현된다. 일부러 감독은 유괴된 초희와 태인, 태인의 어린동생과 창복의 에피소드를 따뜻한 가족드라마처럼 연출한다. 어느새 태인 가족의 부족한 결핍을 메꿔주는 메시아로 초희를 표현한다. 비정상의 가족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처럼 말이다. 여타의 영화처럼 악의가 없이 어쩔 수 없이 초희를 데리고 온 말 못하는 바보 태인에게 감정이입 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은 이런 기대감을 한방에 부셔버린다. 초희를 장기밀매집단에게 넘기고 나서 후회하는 태인을 보여줄때까지 영화의 관객들은 태인에게 감정이입 되어 있다.
"그래 태인이 잘못했어. 이제라도 초희를 구출해와" 그러고 태인은 그러한 자신의 과오를 다시 잡기 위해 다시 태인을 구출해낸다. 이제 회개한 것이다. 초희에게 용서도 빌고 다시 초희가 안쓰러워 초희를 부모에게 돌려준다. 그러나 초희는 그런 태인을 유괴범이라며 신고해버린다. 그동안 태인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다시 초희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게된다. 초희에게 태인과 창복은 자신을 팔아넘기는 유괴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무지의 상태의 설정으로 아이들을 캐릭터화 했다. 아이들은 순백의 상태이다. 이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 학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인의 어린동생 문주는 시체를 묻는 것도 놀이처럼 하고 납치된 초희 조차 시체를 치우고 떨어진 피에 꽃을 그린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주제가 선과 악에 대한 모호성을 꼬집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