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리뷰(파리 리뷰, 다른 출판사)
센강에 정박한 곡물 운반선에서 날아온 단편들
감각적인 표지와 서정적인 이름으로 눈길을 끄는 책,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문학 실험실’ 파리 리뷰가 주목한 단편 열 다섯 편을 모은 책이다. ‘파리 리뷰’가 뭔데? 라고 질문을 던질 독자들에게 파리 리뷰가 창간호에서 밝힌 목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파리 리뷰>는 요란한 선동가나 음모꾼이 아닌 좋은 작가들과 시인들을 환영합니다. 잘 쓰기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초심을 잃지 않고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파리 리뷰는 작가의 경력, 출신국, 성별,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었고, 여전히 ‘작가들의 꿈의 무대’로 꼽힌다. 파리 리뷰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낭만적인 소개로 두 가지를 꼽고 싶다.
1. 지금까지 발간한 잡지를 모두 책꽂이에 꽂으면 그 길이는 3.6m에 이른다.
2. 초창기에 1년 동안 파리 센강에 정박한 곡물 운반선에 사무실을 차린 적이 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각자의 세계를 담은 글을 읽어 내려가는 편집자와 그들 곁에 쌓인 3.6m의 책 탑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고심하며 골랐을 단편들이 모여 엄청난 길이의 길이 되었다. 그 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파리 리뷰의 책을 기꺼이 집어 들 이유는 충분하다.
제가 건져 올린 문장은요
이 책에 실린 단편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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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 데니스 존슨
관습을 부수는 통렬하고 날카로운 서사 - 제프리 유제니디스
어렴풋한 시간 | 조이 윌리엄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같이 생생한 글 - 다니엘 알라르콘
춤추지 않을래 | 레이먼드 카버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한 가려움 - 데이비드 민스
궁전 도둑 | 이선 캐닌
엄청난 깊이의 지혜, 수수께끼, 치밀함 - 로리 무어
하늘을 나는 양탄자 | 스티븐 밀하우저
평범한 일상을 환상으로 만드는 세밀한 감각의 축적 - 다니엘 오로즈코
에미 무어의 일기 | 제인 볼스
화자, 서술, 유머 모든 것이 명징하다 - 리디아 데이비스
방콕 | 제임스 설터
대화로 구성된 짧은 걸작 - 데이브에거스
펠리컨의 노래 | 메리베스 휴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 - 메리 겟스킬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우리는 영원히 실패하기에 경이롭다 - 알렉산다르 헤몬
늙은 새들 | 버나드 쿠퍼
분노, 애정, 그리움, 두려움을 탁월하게 다룬다 - 에이미 헴펠
라이클리 호수 | 메리 로비슨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 샘 립사이트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 리디아 데이비스
문장 몇 줄로 우주를 전달한다 - 앨리 스미스
거짓말하는 사람들 | 노먼 러시
편집장은 첫 문장만 읽고 바로 출간을 결정했다 - 모나 심슨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 에번 S. 코널
완전히 새로운 연민을 느끼게 하는 독창적인 인물 - 웰스 타워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 댈러스 위브
이 미친 시대에도 재미있고 기괴한 이야기 - 조이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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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생각하는 단편의 묘미는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단편을 읽는 가장 재미있는 방법은 아름다운 문장을 건져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열다섯 편의 소설을 읽는 일은 곧 작가가 창조한 열다섯 개의 세계를 만나는 일인데, 이 세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묘사를 혹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단편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실린 단편은 짧거나 길고, 도전적이고 새롭다. 그렇기에 함부로 글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건져 올린 문장들을 소개한다(작품명 앞에 덧붙인 번호는 책에 실린 순서이다).
1.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데니스 존슨)
나는 모든 빗방울들의 이름을 알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20쪽
2. 어렴풋한 시간(조이 월리엄스)
어떤 일도 그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일도 노골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변화하게 한 일들은 흐릿하고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이상하게 거추장스럽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삶을 살게 했다. 죽음은 철저하지 않았다. 죽음에는 선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모든 사랑과 책임만 남겨두고 야옹거리며 영영 사라졌다. -43
3. 춤추지 않을래(레이먼드 카버)
“저기 저 사람들, 쳐다보고 있어요.” 여자애가 말했다. “괜찮아.” 남자가 말했다. “내 집인걸.” 그가 말했다. “춤춰도 돼.” -105쪽
8. 펠리컨의 노래(메리베스 휴즈)
이른 저녁 빛에 돛단배들이 섬세한 초승달 모양 파도 사이에서 출렁였다. -262쪽
9.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는 1882년 4월 30일 동틀 녘 남쪽 하늘의 구름이 어떤 형태였는지 전부 외웠다. -289쪽
10. 늙은 새들(버나드 루퍼)
나는 내가 들고 있지만 떨어뜨리지 않을 돌멩이처럼 굴복을, 휴식의 고요를, 중력을 사랑한다.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캘리포니아의 겨울치고는 빛이 온화했고 태양이 기울어서 그림자들이 길다. -313쪽
11. 라이클리 호수(메리 로비슨)
버디, 슬픔이란 참 수수께끼 같아. 아주 시적이기도 하고. -340쪽
12.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리디아 데이비스)
잠들었다가 단두대 꿈을 꾸었어. 이상하게도 아래층에서 자는 내 조카도 단두대 꿈을 꾸었다지 뭐야.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지.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아래로 흐르는지 궁금해. -352쪽
14.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에번 S.코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삶에 무지한 채로 생이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오랜 세울을 스치듯이 지나 서서히 잔잔한 무덤으로 가라앉는다는 내용이었다. -423쪽
15. 스톡홀름행 야간비행(댈러스 위브)
그늘진 북구 위에 떠 있으려니 우리 모두 암흑 속으로 서서히, 조금씩, 부분부분 들어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삶이 흩어져 사진으로, 편지로, 증명서로, 책으로, 상으로, 거짓말로 들어선다. -447쪽
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작품은 스티븐 밀하우저의 「하늘을 나는 양탄자」이다(막상 어느 한 작품을 고르려니 쉽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감각 기억이다. 그게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이다.(209쪽)라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해설을 쓴 다니엘 오르즈코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글을 읽으면서 부모님 몰래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마을 위를 날아다니는 아이의 시선을 공유하며 어릴 적 한 번은 꿈꾸었던 감각을 회상했다.
지붕 끝 모서리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으며 양말을 방문에 걸어두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억은 대체로 그런 기억들이다. 기억은 어쩔 수 없이 흐릿해지지만, 그때의 강렬한 감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소설은 기꺼이 행복한 감각 기억을 떠올리도록 도와준다.
각자의 세계에서 꼬리를 물고
이 책은 열다섯 편의 소설과 이 소설을 꼽은 사람의 해설이 덧붙여 있는 형식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그래서 총 30명의 저자를 알게 되는 셈인데, 만약 누군가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의 지난 글에 대한 이력을 더욱 주의 깊게 읽어보면 좋다. 그렇게 이 책은 한 편의 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재미있어서 작가인 ‘스티븐 밀하우저’ 소개를 읽어보았더니 그의 단편소설 「환상마술사 아이젠하임」은 <일루셔니스트>로 영화화되었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저자가 만들어낸 세계와 세계 속 문장이 좋았다면 그 영화를 통해 그의 세계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모습을 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사계절 4부작’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저자인 앨리 스미스가 리디아 데이비스의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를 읽고 쓴 해제를 읽고 좋아하는 작품의 저자가 꼽은 단편은 어떤 글인지 또 그에 대한 감상은 어떠한지 엿볼 수 있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에서 브리지 부인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브리지 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독자가 있다면, 에번 S. 코널의 다른 소설 『브리지 부인』과 『브리지 씨』를 자연스럽게 찾아 읽게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두 소설은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브리지>로 각색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상류층 가정의 삶에 흥미를 느낀다면 소설과 영화 모두 재미있게 읽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열 다섯 편의 글과 더불어 열 다섯 편의 해제를 담은 책이지만, 저자들이 쓴 또 다른 글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독자들은 원한다면 기꺼이 그들의 다른 세계로 넘어가 새로운 독서를 시작할 수 있다.
어렵지만 신비로운 단편의 세계
창작 수업에서 단편소설을 써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단편소설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계속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분량에 제한이 없다면 상상하고 그려내고픈 장면과 서사를 끊임없이 진행 시키면 되지만, 아니라면 어떤 걸 덜어내야 깔끔하게 쓸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단편소설을 발견하면, 어떻게 이런 참신한 형식으로 술술 읽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을까 절로 감탄하게 된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의 원제는 ‘Object Lessons(실물 교육)’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꼽은 단편들을 수록한 책 인만큼, 아직 단편소설의 세계가 낯설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글 스타일은 어떤지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다양한 글 속에서 유영하다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집 앞 야외 잔디밭에 놓인 가구와 그 사이에서 춤을 추는 커플을 상상했고,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내 삶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고민했고, 내 생각을 친밀한 타인에게로 흘러 들어가서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신체 일부를 기꺼이 버릴지 가늠해보았다.
열다섯 각각의 세계에서는 문장과 문단과 서사가 마음껏 종이 안을 돌아다닌다. 각각의 색깔을 가진 글 속에서 활자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가장 멋지다고 생각되는 풍경을 공유해주시길 바란다.
같은 책을 읽은 우리의 생각은 어쩌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리뷰를 보고 싶다면, 아트인사이트에서:-)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7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