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 너. 이모 아들 00형 알지? 00형 만나 볼래? "
내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어머니가 친척 형을 만나 일자리를 얻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한적 없었다. 나의 선택들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응원해주셨다. 그런 분이 난생처음 뭔가를 제안을 한 것이다. 당혹스럽고 놀랐다.
" 네. 만날게요. "
전화를 끊고 어머니가 왜 그러셨을지 생각해봤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하던 연극을 하루아침에 그만두었고, 어느새 나이는 30대 후반이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기를 보내는 아들이 걱정스러우셨나 보다. 하긴, 나도 내가 불안한데 어머니는 오죽하셨을까...
며칠 후. 형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이 있는 동네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던 터라 주변을 돌아봤다. 반 지하와 지하 극장만 돌아다니던 삶이라 사무실이 밀집해있는 빌딩 숲을 거닐고 있자니 어색하기도 하고 모든 게 신기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동료들과 먹고 걷는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을 보았다.
마치 숲에 사는 요정들을 만난 것처럼 빌딩 숲에 거니는 그들을 신기하게 관찰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사실 직장인들을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직장인 아마추어 뮤지컬 극단에서 강의를 몇 년간 했다. 매주 주말마다 연습실에서 직장인들을 만났다. 다양한 직종과 직급의 직장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나에게 했던 말은 한결 같이 똑같았다.
"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시잖아요. 회사는 정말 나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가요."
나를 왜 부러워하는지 의아했다. 내 연봉을 알면 부럽다는 말은 당장 취소할 텐데 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빌딩 숲을 걸으며 깨달았다. 내가 그들을 만났던 것은 연습실이었다. 연습실은 나의 주 공간이고 그들의 단편적인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을 있어도 못하는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사람들. 하지만 오늘은 내 공간이 아닌 그들의 공간에서 그들을 봤다. 나는 나만을 위한 일을 하지만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했다. 아주 작은 사치로 주말에 2-3시간 뮤지컬을 했지만 그것 말고 다른 사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에너지를 가지고 회사로 돌아가 더 열심히 일했다. 하기 싫지만 참고 성실히 하루를 버텨내며 일한 대가로 가족을 책임지는 삶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 형과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고 형의 마음에 든다면 그들처럼 책임감 있는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곧 반 지하도 탈출하고, 제대로 된 가정도 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 항상 소리치던 불안도 오늘은 잠잠했다.
그렇게 빌딩 숲을 돌아보고 형의 사무실이 있는 깨끗하고 반듯한 신축건물 앞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반 지하와 다르게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반짝 거리는 건물이 내가 품은 희망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7층 사무실로 올라가 형을 만났다. 친척이라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사이라 서로 낯설었지만 형은 반갑게 맞아주시며 본인이 하는 일과 사무실을 보여주시며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설명해주셨다.
형이 하는 일은 금융 상품을 파는 일이었다. 합법적이고 일한 만큼 보수를 챙길 수 있는 영업직이었다. 힘들었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자리를 잡아 내가 평균 정도만 해도 월 500만 원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사실 월 250만 원 준다고 해도 당장이라도 할 판이었다. 내 처지에 참 감사하고 과분한 일이었다. 딱히 다른 대안도 없고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내가 대답만 하면 되는 순간이 왔다. "당장 내일부터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 형... 죄송하지만 이틀만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
이미 내 사정을 들은 터라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는데 내가 시간을 달라고 해자 형은 놀란 것 같았다.
" 그래.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
집으로 돌아오며 방금 겪은 이상한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하게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삼천배라도 해야 할 판에 이틀이라니? 도대체 나란 놈은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건지... 예술가랍시고 괜한 자존심이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 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해결할 마땅한 대책도 없으면서 저런 큰 기회를 받았는데 '이틀이나 생각해본다고?', '취직하기 정말 어려운 시기에 제대로 된 사회 경력도 없는 백수나 다름없는 놈이 지금 뭐하는 짓이냐?' 잠잠했던 불안이 어이없는 내 행동에 온갖 욕설을 쏟아내는 통에 지하철을 헤갈려 몇 번이나 잘못 탔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불안은 '당장 형한테 연락해서 내일부터 출근하겠다고 해!' 라며 나를 다그쳤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한테 연락할까 두려워 휴대폰을 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리 망설이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분명 내 안에 어떤 존재는 이 기회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존재가 뭔지, 왜 그러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잃었던 책들.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들을 뒤지며 내 행동을 분석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틀이 지나갔다. 이틀 동안 불안은 과도한 에너지에 지쳤는지 잠시 사라졌다. 그러자 곧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 돈을 벌어야 하고, 벌고 싶다. 단,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벌고 싶다. '
에?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 인가? 명상이라는 것을 작년부터 시작했고 확실하진 않지만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살짝 경험했다. 그리고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불안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는데 그 목소리가 오랜만에 등장한 것이다.
' 내가 원하는 방식이 뭔데? '
' 글쓰기, 독서 같은 걸로 돈을 버는 거. '
' 작가가 되라는 거야? '
' 뭔진 나도 몰라. 그건 네가 찾아야지! 단지 내가 아는 건 남들한테 정신적 가치로 도움이 되는 것. 너처럼 자존감이 낮거나 자기 비난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그게 네가 원하는 방식이야. '
' 너... 누구야? '
' 내가 누구냐고? 내가 너지. 내가 누구겠냐? '
' 그러다 평생 반 지하에서 못 벗어나면 어떻게 해? '
' 그럼 불안이 시키는 대로 살아. 모든 건 네 선택일 뿐이야. 정답이 어디 있니? '
짧고 강렬했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정체모를 내 안의 어떤 나와 대화를 한 뒤. 나는 형에게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친척 동생에게 귀한 일 자리를 소개해주시며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그걸 거절했으니 얼마나 건방져 보일까. 그렇게 감사와 죄송한 마음을 담아 거절을 보냈다. 다시 돌아온 불안은 이미 저질러버린 나를 미친놈 취급하며 소리쳤다. 그렇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무언가 분명해진 느낌이 있었다.
빌딩 숲에 들어가던, 예술가로 살던 어떤 옳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기가 진정 원하고 의도한 대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고 진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책임감이다. 연극을 그만두었고, 다른 삶을 시작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탐색하는 중인데 가난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 것은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건 단지 불안을 잠재우는 것일 뿐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는 것. 돈을 열심히 벌되 내가 벌고 싶은 올바른 방식으로 벌어야 한다는 것.
내일부터 더 힘든 길이 시작될 것임을 알지만, 오늘 밤은 편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