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챌린지 #다시또쓰기 #1/100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 치유
병이나 상처 따위를 잘 다스려 낫게 함; 치료
코로나의 공포로 일상이 마비된 시기의 한 복판에서 <치유의 글쓰기 30일 챌린지>를 했다. 그때 챌린지의 문을 닫으며 사유했던 치유와 치료, 그 사전적 의미를 살며시 들여다본다.
그저 오래 살겠다는 장수의 시대를 지나고 건강하게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웰빙을 넘어 이제는 누구나 거침없이 말하곤 하는 몸과 마음의 힐링.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기 힘들어진 시대, 흘러 넘치는 정보에 분별력을 잃어가며 외부의 압력으로 내면의 공허함에 시달리는 우리는 내외적인 힐링을 갈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몸을 떠난 마음을 말할 수 없고 마음을 떠난 몸을 말할 수 없듯 힐링은 우리의 삶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 화두가 되었다. 나의 삶에서도 거침없이 힐링, 힐링을 말하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 그 당시 힐링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고되게 내려 앉아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기 힘들 지경이 되어 무언가에 의존하거나 의탁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러 애타게 찾곤 하던 어떤 것이었다.
치유와 힐링, 을 들여다보면 또 그 둘은 묘하게 다르다. 내 목소리로 치유라고 발화하면 자가치유, 자연치유, 숲속의 기운, 조용하고 평온하고 안정된 기운이 감돈다. 다시 외래어를 빌려와 힐링, 이라고 발화하면 굳이 안정감이 수반되지 않아도 무언가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나에게 글쓰기는 즐거움을 주는 차원의 이상이었다. 늘.
파고들수록 묘한 신비감을 주고 나의 존재감이 확고해지면서 종국에는 나에게 힘을 실어준다.
어떤 날은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들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누군가를 퍽이나 감동시키고 공감을 얻게 한다.
어떤 기록도 허투루 남은 적이 없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글이라도 내게는 귀한 사유의 파편이었고 누군가가 감탄하며 좋아해주는 글이라도 내가 쓴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모든 글쓰기는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다.
앞으로 글쓰기를 통해 비워내는 연습, 그리고 겸손을 배우고 싶다. 나의 글을 통해 누군가는 위로를 받았으면 하고 동지애를 느꼈으면 하고 치유의 느낌까지 전달받았으면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의 심지가 바로 서지 않으면 작은 입김에도 훅 꺼지고 마는 촛불임을 안다. 이제 나는 탄탄한 심지를 세워 어떤 입김에도 꺼지지 않는 LED같은 생명력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매일 땅 파면서, 매일 깨지면서, 더 아프고 고통 받아도 괜찮으니 요즘 내가 몰두하고 있는 걷기처럼, 숨쉬기처럼 그렇게 글쓰기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나의 치명적 단점은 정리를 못한다는 것... 머리 속에 많은 소재들과 글감이 여전히 떠돌아서 버겁다.
일정 궤도 안에서 자리 잡은 작가들은 이런 고민할 시간에 글을 쓰겠지?
정리되지 않는 건 생각일까, 마음일까.
줌파 라히리라는 벵골 출신 인도계 미국인 작가가 있다. 그녀의 책을 아직 단 한권도 읽지 않았지만 틈틈히 훔쳐보곤 하는 그녀의 가치와 사상에 매료되어 있다. 세상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두지 않고 부지런히 겉돌기를 자처하는 사람. 미국이 가진 우월주의에 반감을 가진 의식으로 그녀는영어를 버리고, 2살 때 떠나온 나라의 언어도 취하지 않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어떤 인연의 고리도 없는 이탈리아어로 40여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아마 나는 이토록 생경한 이름의 작가의 행적처럼 독특하지만 보편적인 글을 쓰고 싶고 또 평범하지만 넘치도록 매력적인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것이겠지.
말하자면 내게 글쓰기는 불완전하게 제정신을 지키게 해주는 의식같은 것. 그러니까 온전히 불완전한 나라서 불완전의 미학을 이렇게나 아낀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