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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치 Jan 17. 2024

들국화 II : 마스터피스의 그늘에 가려진 비운의 걸작

by 들국화 (1986)

 중학생 때인가부터 전인권이라는 사람이 TV에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산발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지저분한 머리털과 그에 못지않은 수염을 단 그의 강렬한 인상에 경악했던 것 같다. 언젠가 무슨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그 것만이 내 세상>을 부르며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아니 노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나?' 하며 눈이 커지고, '아니 이런 노래도 있었나?'에서 펄쩍 뛰었다. TV를 같이 보던 삼촌에게 물어, 그가 예전에 '들국화'라는 밴드의 보컬이었고 방금 부른 노래도 그 들국화의 음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시대, 전인권과의 만남은 곧 들국화와의 조우와 진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밴드 들국화의 활동 기간은 극히 짧았고, 보컬 전인권의 캐릭터는 다른 모든 멤버들의 이름을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전인권은 타 멤버들의 동의 없이 독단으로 들국화 3집을 발매하기도 하는 등 90년대와 2000년대 내내 '전인권 = 들국화'라는 등식이 굳어져 갔다.


 들국화. 들국화. 참으로 투박하면서도 어여쁜 이름이다. 들에서 핀 국화라니! 거친 들에서 아무렇게나 핀 꽃들 중 국화와 닮은 꽃들을 통틀어 '들국화'라 부르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이름을 밴드로 쓰니 정말 많은 것을 은유하게 된다.


 들. 개간되지 않은 야생의,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지만 아직 쓰임이 없는 그 곳이리라. 이는 직관적으로는 그룹 들국화가 활동하던 80년대 중반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 더해 나는 들국화가 갖는 ‘들'의 이미지가 전원권을 표상하는 이미지라고도 본다. 정말이지 그는 들녘 어딘가에서 일어선 야인과 같은 모습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국화. 봄 부터 소쩍새가 그리 울어야 피는 동양의 대표적인 관상식물이다. 예쁜 꽃을 위해 정성스레 길러지는 비싼 식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겨울을 앞둔 추위를 이겨내 피는 강인함을 표상하기도 하다. 국화라는 단어는 들국화 음악의 정갈함, 청초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최성원과 허성욱의 음악과 연주에서 들리는 세련됨에는, 분명 들에서 나온 전인권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국화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들국화 음악의 미적 완성도가, 이러한 ‘들' 적인 요소와 ‘국화'적인 요소의 조화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들국화 해체 뒤에 전인권이 들려준 그의 음악도 국화처럼 아름다운 적이 있고(그의 표절과 사생활에 관련된 논란은 차치하자), 최성원과 허성욱의 음악에서도 거친 들이 연상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한데 어울린 ‘들국화'의 성과에 비견될 수는 없는 것이다.


 들국화는 사연이 많은 그룹이다. 결성부터 해체, 그리고 재결성과 재해체, 안타깝게 고인이 된 멤버들의 이야기까지 순탄하지 않은 바이오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밴드가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안정되었던 그 시절, <들국화>와 <들국화 II> 사이의 시기 공연을 함께한 ‘실전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앨범이 <들국화 II>이다.


 앨범 내내 들국화는 ‘관계'에 대해 노래한다. 아는 이 없는 외로움이나, 함께하는 소중함에 대해,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지 못해 / 한낱 외로운 사람일뿐야’ 라고 절규하거나, ‘우리사이엔 너무 넓은 간격이 날이 갈수록 / 서로 부담될만큼 우린 약해지고’ 라며 읊조리는 식이다. 1집 이후 탈퇴한 조덕환이나, 결성 전후로 6년 내내 전인권과 싸웠다는 최성원의 회고를 떠올려보면, <들국화 II>의 노래가 오히려 들국화 음악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오랜 세월, 나에게 들국화는 곧 앨범 <들국화>를 의미했다. 가히 전무후무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1집 <들국화>의 찬란함 때문에, 2집의 존재는 자주 뇌리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내가 2집에 수록된 <또 다시 크리스마스>나 <내가 찾는 아이> 같은 곡들을 매우 사랑했음에도 말이다.


 1집 <들국화>에 실린 음악이 오랜 준비를 마치고 정성들여 조탁된 곡들이었다면, <들국화 II>의 음악들은 멤버들과 함께 무뎌지고 삭혀진 노래가 아니었을까? 문득 꺼내보는 <들국화 II>의 커버 사진 속에는 나란히 선 여섯 젊은이들의 모습이 있다.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아니 좋아 보이지도 않는 그 모습 속에서 그리움만이 흐릿하다.


 <들국화 II> 이후로 밴드는 사실상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들'과 ‘국화', ‘혼자'와 ‘함께', ‘안정'과 ‘불안정'의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의 거칠고 아름다운 젊은 날 같은 음악을 담고 있는 것이 <들국화 II>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Release Date   September 25, 1986


  

    1집 <들국화>와 마찬가지로, <들국화 II>에는 <우리노래 전시회 1집>(1985)의 수록곡들 중 일부를 담고 있다. <제발>과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 그 곡들이다.  

    2015년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전인권은 들국화 재결합에 대해 ‘다시 할 수도 있는 문젠데요, 최성원이라는 사람의 개성과 저의 개성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했습니다'라면서도 확답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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