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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17. 2019

도망 가야 할 이유 찾기

일과 삶의 의미

 메일이 왔다.


"그동안 이 회사를 다니며 좋았고 앞으로도 무운을 빕니다."


옆 팀 대리가 경력직으로 온 지 1년 만에 나가는 거였다. 진짜 퇴사할 사람은 티 안 내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난 겨울 떠났던 라오스 여행에서 동행했던 오빠도 길을 걸을 때마다 퇴사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난 퉁명스럽게 대꾸했었다.


ㅣ진짜 퇴사할 사람은 이렇게 말도 안 해. 메일 한 통 딱 보내고 나간다고.


멋쩍게 웃으며 자긴 한국 돌아가면 진짜 퇴사할 거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데 괜히 마음이 짠했다.


우리는 라오스의 소도시 루앙프라방에서 탁발을 함께 구경했었다. (*불교의 수행 의식 중 하나로서 스님이 남에게서 음식을 빌어먹는 행위) 이미 너무 상업화된 탁발 의식은 가슴에 와 닿는 게 1도 없었는데, 이곳 스님들에게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아침인지라 대충 음식 받는 시늉만 하며 지나갔다. 스님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ㅣ 오빠 난 탁발의식 정말 별로였어. 스님들도 참 의무적으로 일하는 것 같아.


회사에서도 늘 이런 얼굴을 보곤 했다. 어느 날의 나도 이런 얼굴이겠지. 씁쓸함만 남긴 탁발 의식이 끝난 이후 오빠가 먼저 귀국길에 올랐다.


루앙프라방 탁발

귀국 후에는 한가지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다.


ㅣ 나 퇴사. 난 한다면 해. 블루 라군 1도 뛰었잖아.


블루라군 1은 라오스의 대표 관광지이자 관광객들이 11m 높이의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다. 오빠는 고소공포증인데도 불구하고 그 높은 곳을 무려 두 번이나 뛰어내렸다. 물론 아주 멋있게 뛴 건 아니었고, 심장 아프다며 다리를 덜덜 떨며 하강했다. 의외로 오빠의 퇴사도 다이빙처럼 순식간에 진행됐다.


같은 고민을 해왔던 동지로서 누구보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얼떨떨하기도 했다.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 결국 블루 라군 1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ㅣ 앞일을 너무 자세히 계획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내가 보기엔 넌 할 수 있어.


발을 뻗으려다 주춤하고 뛰어내리려다 또 주춤하던게 20분, 나무 아래에서 오빠가 소리쳤다. 그 후로도 계속 머뭇거리다 결국 뛰지 못한 채 올라왔던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오기로 다음날 또 갔는데 역시나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뛰면 되는데 결국 마지막 날까지 실패로 끝이 나버렸다. 회사 밖을 나오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블루 라군 1

오빤 퇴사 후 카멜레온처럼 바뀌어갔다. 그 더운 라오스에서도 각 잡아가며 옷을 입던 패션 회사 MD가 낡은 벙거지 모자에 큰 박스티, 긴 배낭을 메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나타났다. 백수인데 뭐하며 지내냐 물어보면 도서관에서 여행 책 보고 나왔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ㅣ 요즘엔 유튜브 공부하고 있어. 세계 일주할 건데 여행만 다니긴 좀 그래서 기록하려고


그 말을 한지 정말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정말로 여행 백수라는 유튜브 채널이 개설됐다. 나는 이제 여행을 가고 싶을 때마다 오빠가 올린 동영상에 좋아요를 누르는 구독자가 됐다. 26시간 슬리핑 기차를 타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는 이야기, 폭풍 속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이야기. 채널에 올라오는 여행 동영상을 보다 보면 이 사람이 진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어느샌가 세상 부러운 사람으로 탈바꿈됐다.




한낮 온도 30도.

5월인데도 꽤 이르게 찾아온 여름 날씨에 금방이라도 아이스크림처럼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점심시간이었다. 경력직 대리가 퇴사하고 나서도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오전 근무를 끝낸 후 점심을 먹고 나왔다. 테헤란로 빌딩 사이로 채 가려지지 않은 햇빛이 직렬로 내려앉고 있었다. 이렇게 쨍하고 날 좋은 날엔 하루 쉬라는 법령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복귀하기 싫은 몸을 애써 회사 쪽으로 돌려세웠다.


횡단보도엔 사람이 많았다. 근처에 근무하는 회사원들은 죄다 이 길로 나온 건지 요리조리 빠져나오는 게 힘들었다. 신호등 반대편에는 선릉이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그곳만 푸르른 녹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도 사람이 많았다. 한땐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곳이 이젠 어엿한 도심 속 관광지가 됐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뀔 것 같자 걸음을 빨리 했고 목에 걸린 사원증이 유난히 달랑거렸다. 만약 죽을 때까지 여기서 일하다 죽으면 어쩌지?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간담이 서늘해진 건 우스울 일이었다.


사내 엘리베이터는 늘 그렇듯 만원이었고인간 젠가 하듯 그 좁은 곳을 또 끼어 올라탔다. 담배 쩌든 냄새, 찌개 냄새, 반찬 냄새, 온갖 채취로 인해 숨이 막혔다. 엘리베이터가 마지막 층인 8층에 멈췄고 들어가기 전 사원증을 다시 고쳐 멨다. 벌써 4년 하고도 몇 달째. 20대 중후반을 모두 이 회사에서 보냈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면 엑셀에 숫자들이 보이고 그걸 보다 보면 시간은 뚝딱뚝딱 잘도 흘러갔다. 엑셀 칸 같은 파티션 안에서 나란 아이가 답답하든 안 답답하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해는 저물고 어느새 퇴근시간은 가까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 해 여름,

무더위가 한창일때쯤 나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라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그즈음 내가 그렇게 퇴사를 하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고민하게 됐다. 가령 <모래의 여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왔다.


어느 날 중산층 정도의 농가에서 자란 장남이 훌쩍 집을 나가 버린다. 여자 문제도 아니고 빚 문제도 아닌데 대체 뭐 때문에 집을 나왔냐고 물었더니 이 청년은 그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청년의 가출에 대해 소설 속 A와 B가 얘기를 나누는데 대충 옮겨오자면 아래와 같다.


A:  생각해보면 그 청년의 마음도 이해가 가잖아. 농부란 것은 일해서 땅을 늘리면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셈이니까... 결국 고생에 끝이 없고, 그런 나머지 얻어지는 것은 더욱 고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가능성뿐이야


B: 그래서 그 가문을 이을 청년은 어떻게 되었는데요?


A: 그야 미리부터 계획한 일이었으니 일자리 정도는 진작부터 알아봤겠지. 그다음에는 뭐 월급날이 되면 월급을 받았을 테고 일요일에는 옷을 갈아입고 영화나 보러 가고 그랬겠지.


B: 그러고는요?


A: 그런 거 직접 본인한테 물어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겠어?


B: 역시 돈을 모아서 라디오를 샀을까요?


여기서 라디오란 주체가 타인과 소통하는 어떤 통로를 뜻했다. 이 사회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여기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하는 매개체. 거창하게 말하면 존재 이유를 이 책에선 라디오라고 비유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그런 걸 갈망하며 대학 갈 때는 전공을 선택했고 취업할 때는 일하고 싶은 분야와 회사를 선택했다. 그때그때 충분히 고민했고 나름대로 잘한 선택이라 믿었는데 살다 보니 그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찾아오더라.


언제부턴가 회사에서 나는 시도하는 게 두려워진 회사원 A에 불과했다고 남들 하는 대로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말,  두루두루 좋게 좋게 넘기며 둥글게 살라는 말, 아이디어는 좋지만 리스크가 있으니 다음에 하자는 말만 주야장천 듣다 보면 내 속이 삭막하다 못해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았다.


그렇게 쭉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굳어버려 누군가 내 생각을 물어와도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파도 파도 쏟아지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이게 운명이려니 단념하고 살아가는 모래의 여자처럼...

모래 사막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무엇으로 이 세상을 헤쳐나가고 바라볼 건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견지해 나아가는 태도를 배우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게 없으면 매달 따박 따박 들어오는 월급도 어디 어디의 누구라는 직함도 한 번 쓰다 마는 일회용품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겼었던 적도 있었다.


특히나 홀로 여행을 하면서부터는 이 태도라는 것에 대해 학습할 기회가 많았는데, 늘 똑같고 조금은 답답한 사각형의 회사 건물 밖에서 난 더 이상 부품이 아니었고 내 이름 앞에 붙은 회사명과 내 이름 뒤에 붙은 직급에 상관없이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여든 살의 일본인 할아버지였으며 어떤 날은 태국인 승무원이었고 어떤 날은 스위스의 기관차 수리공이었던 내가 만난 수많은 타인들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길들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다. 그건 책으로도 만나볼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업이   없기에 결국 거대 모래사막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내가  시간을 보다 주체적으로 사용할  있으려면 다시  선택해야 한다.  일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일을  것이냐.  일이 내게 중요한 가치를 실현시킬  있는 일이냐. 그렇지 않으냐.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대개 가치 실현 쪽에 더 가까웠다. 풀타임 잡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글을 쓰는 건 내가 위로받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그 온기가 다시 또 누군가에게 감동으로 다가가 다른 형태의 따뜻함으로 전해진다면 정말이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긴 세월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줬을 <모래의 여자>를 다 읽고 나서도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내가 나만의 라디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였다. 세상 하찮아 보였던 오빠가 단 한 발을 내디뎌 자기 색깔과 자기 시간과 자기 표정을 찾았듯 어쩌면 이렇게 계속 글을 쓰다 보면 나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게나 모래 구덩이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모래의 여자>또한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중략)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결국 난 이 글을 마치는 지금까지도 앞으로 한발을 내밀지 못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뛰어내리지는 못했지만, 조금 더 내 생각들을 써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다듬어진 이후에, 도주 수단은 그러니까 그 다음에 생각해도 무방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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