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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r 13. 2019

40년째 한 우물을 판다는 건

예술가가 되지 못한 나

40년 동안 물방울만 그린 사람이 있다.


"옛날에 달마대사는 중처럼 벽만 쳐다보고 앉아 9년 만에 득도 해탈해서 부처님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미친놈처럼 캔버스를 마주하고 앉아 물방울 그리기로 40년을 보냈어"  


김창열 화백이 한 말이다.

실제로 그가 그린 물방울 그림은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싶을 만큼 입체적이고 사실적이었다. 회화인데도 불구하고 캔버스 물방울은 금방이라도 뚝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이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대체 얼마나 물방울을 연구했으면 이렇게까지 사실적이지?


김창열 미술관의 물방울 전시작

전시 작품 해설에 따르면 김창열 화백은 어느 날 우연히 자기 그림 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보고 그 안에서 회화의 모든 답을 찾았다고 다. 그 후로 물방울에 대한 그만의 덕질이 시작됐다. 


예를 들면 자주 입던 린넨 작업복 물방울이 튀었다. 이때 보통 사람이라면 닦거나 갈아입어야겠다 생각할 텐데 입고 있던 린넨 천을 찢어서 캔버스로 사용했다. 마시던 커피를 쏟아 천연색을 입힌 후 방금 자기가 봤던 물방울을 회화로 그려냈다. 보고 느낀 질감과 모양을 최대한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거였다.


물방울에 빛이 투영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어서 유리를 깎아 물방울 모양 조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브제 하나에 대해 찢고 깎고 그리고 이토록 열정적일 수 있다니 새삼 그의 덕후 기질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김창열 미술관의 유리 물방울 조각

김 화백은 40 평생 물방울만 그렸는데도 아직도 물방울로 그려낼게 많다고 했다. 나는 회사 생활을 4년밖에 안 했는데도 수록 딴생각이 많이 드는데 어떻게 이렇게 뚝심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자기가 선택한 길에 의심을 갖지 않고 오래도록 밀어붙이는 태도에 대해선 정말 배우고 싶었다. 일이든 생활이든 뭘 하든 이렇게만 한다면 그 영역에 한해선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사람이 예술하는 건가 봐요"


전시를 다 보고 난 후 혀를 내두르며 같이 본 언니에게 말했다. 꽤나 자조적인 말이었다.




나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고 일기 쓰는 걸 좋아했고 대학도 문학 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했다. 열아홉의 나는 줄곧 책으로만 접했던 작가들을 직접 만나 강연을 듣는다는 생각에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교수님과 학생으로 마주하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렸다. 


1학년 1학기 소설 첫 수업,  앉아있는 자리에서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두근거림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언제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런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들이 무심하게 흘러갔.


 "니들은 왜 여기 있니. 책 붙잡고 있는다고 글 안 써져. 나가서 사랑을 하든 어디 여행이라도 가든 해."


학교 앞 집에 회식하러 가자는 교수님께 어느 누구 반박을 하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도 안돼서 나가자는 교수님 눈은 벌겋게 충혈돼있었고 말씀하시는 것도 흐리멍덩했다.

꽤나 따분해 보였다. 


이런 수업 학기 내내 곧잘 반복됐다. 우리 대학에서는 특히 소설 수업 그런 경향이 자주 나타나곤 했는데 예로 교수님 수업엔 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보다 수업 단축되거나 스킵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수업과 달리 평가는 잘 진행됐다. 문예창작학과 대부분의 수업은 한 학기가 끝나면 작품을 써서 내야 했다. 소설 수업은 출석이나 평상시 태도, 학생들의 열의나 참여도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삼지 않고 학기 마지막에 내는 작품으로 점수가 매겨졌다. 비싼 등록금 내고 머릿속에 남는 건 없었지만 솔직히 학점 받는 건 쉬웠다. 


나는 소설 특기자로 입학했기 때문에 또래 학우들보다 아무래도 유리했다. 그동안 써놓았거나 백일장에서 수상했던 작품들을 다듬어서 제출하면 상대평가에서 점수를 따기 쉬웠고 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문학 특기자로 입학한 안 되는 동기들, 이전 학번에 특기자로 입학한 선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소설 전공 수업은 노력하지 않았지만 등급이 잘 나왔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가 20대라는데 이상하게 퇴보하는 느낌이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나온다며 글 쓰는 재능만 믿고 한량처럼 지내는 분위기가 못 견디게 싫어질 때쯤, 나는 소설 대신 시, 희곡, 평론 수업으로 전공과목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등록금이 아까워서 뭐라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된 반항이었지만 갈수록 시가 좋아졌다. 그렇게 소설 특기자로 입학했지만 시를 쓰게 됐고 좋아 마지않던 소설보다는 시를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졸업할 때쯤 기숙사 책상엔 전부 시집이나 , 철학 에세이가 채워졌으며 소설책은 가뭄에 콩 나듯 존재하게 됐다. 바보 같지만  이외의 것들은 책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아주 많이 시를 사랑하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예술에는 정석이나 정답이 없고 애초에 예술가가 창작하는 걸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있었다. 미국의 작가이자 문예 창작 교수였던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그의 에세이 <픽션의 미래와 현격하게 젊은 작가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선 창작 교수와 학생이 맺는 교육학적 관계 자체에 불건전함이 내재되어 있다. 창작 교수의 실제 직업은 작가이지 선생이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창작 선생이 학생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집착하는 다른 직업을 건사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 결과도 인정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문예 창작이라는 과목에 한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교수이기 전에 작가이지 선생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문학을 배우고 싶었다. 마치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유사곡을 또 듣고 싶고 이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알고 싶었던 것처럼...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고 어쩌다 이런 글을 썼는지 좀 더 가까이에서 알고 싶었다. 그들이 내 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동경하던 작가가 되고, 문단이라는 선망하는 커뮤니티에 속하고 싶었다.


졸업 이후, 나는 회사원이 됐고 교수님 명성은 예전만큼 못해졌다. 미투 운동으로 한창 문화계가 뜨거울 때 문단 내 성추행 문제로 교수님 성함이 거론됐기 때문이었다. 후에 영화로 제작될 만큼 유명했던 교수님 작품이 간될 즈음, 교탁 위에 아빠 다리로 올라앉아 조교에게 와인 가져오라던 교수님 얼굴은 아직도 생생했. 여자 학우 A에게 누구누구야~ B에게 누구누구야~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을 부르짖던 교수님의 취기 어린 얼굴은 그 작품의 남자 주인공과 꼭 닮아있었다. 후에 영화화된 작품은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이  만큼 예술과 선정성의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했지만, 기억 속 교수님 모습은 논란의 여지없이 후자였다.


예술가와 작품을 따로 봐야한다, 텍스트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면 딱히 말은 없. 각자의 생각이 다르듯 사람은 결국 자기가 믿는 대로 보는 법이니까. 그러나 적어도 나한테는 작가와 작품을 따로 떨어트려보기엔 그 날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다.

 



미술관을 나올 땐 비가 왔다. 물방울을 너무 오래 봐서 그런가. 건축물 벽면에 방울방울 달려있는 빗방울 조차 예술같이 느껴졌다. 한 가지 오브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뚜렷하다는 거니까.


예술은 말하고자 하는 게 뚜렷해야 하며 그러한 메시지가 예술가 고유의 색깔로 작용되곤 했다. 물방울 그린 게 40년이면 내가 지금 살아온 것보다 10년이나 더 되는데 그 긴 시간 자기 색을 가지고 간다는 게 쉬울까. 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도 매번 주문할 때마다 고민하는데 4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물방울 말고 다른 길을 가고 싶진 않았을까. 포기하고 싶고 다른 걸 해보고 싶은 숱한 유혹에 어떻게 견뎌냈을까.


전시를 다 보고 난 후에는 딱히 어떤 작품이 인상 깊었다기보다는 이 사람 정말 어떤 사람일까. 이런 사람이 예술해야지.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작품을 그린 사람 자체에게 호감이 갔다. 내게 다시 한번 성실함이 지닌 가치를 알려주었다고 해야 할까.


나이 들면서 한 가지 믿는 게 있다면 재능은 노력을 못 이긴다는 거였. 문학이든 미술이든 남보다 특출 난 재능으로, 어쩌다 운 좋게 필생의 역작을 한 번쯤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꾸준함이 동반돼야 했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성실으로 이어지고 그래야 그 작품, 그 작가만의  고유성이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너무나 정교한 물방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미술에 있어서도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난 문학이란 한 가지 틀에만 내 인생을 걸어볼 수 없어서 20대 중반에 취업을 했다. 소설 수업이 싫었던 것도 있지만 예술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내가 그만한 능력이 될까. 계속 고민했고 결국 취업의 길을 선택했으니 물방울 작가로 명명되는 이분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지금은 회사  외에도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다시 또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헤쳐나가야 하는가 재차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봤으면 좋겠다. 남들이 쉬이 할 수 없는 노력의 산물을 직접 접하게 되면 내면에 많은 자극이 되는 법이다.  나처럼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방향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이 물방울에서 부디 그 답을 찾을 수 있길.


*표지 이미지 출처: 경향신문 '단 한개의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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