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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pr 28. 2019

부자 되면 행복할까

부자의 정의

성인이 되면 누구나 일을 한다.

일에 만족도를 갖건 갖지 못하건 좋아하는 일을 하든 못하든 돈은 벌어야 하기에. 경제 활동 인구가 되는 순간 행복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사람,  모든  만족스러운 직장을 구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기에 우리는 자주 불행했다. 나와  주변 지인들은 자주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했고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어 했다.


그해 여름,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사이판행 비행기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이 무료했고 사람에 치여 몸과 마음이 힘들어 있을 때였다. 거의 도피성으로 연차를 냈다. 이왕 가는   편히 가고 싶었으나 출국 전날까지 업무에 매여 있었다.

 

휴가는 일부러 남쪽으로 떠났다. 오래전부터 여름 나라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몰라도 남쪽 사람들은 행동이 굼뜬 경우가 많았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낙천적인 성격 탓에 뭐든 빨리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실제로 사이판 음식점에서는 음식 한번 주문하면 3-40 가까이 기다려야 서빙이 됐다. 어딜 가려고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면 오기로  기사 분이 잠들어서 다른 분이 대신  때까지 기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보고 게으르고 책임감 없다고 생각할  있겠지만 나는  느긋함이 좋았다. 분명 불편한 건데 한국을 떠나오면  불편함마저 여유롭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했다.

여름휴가

회사에서는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쁜지 늘 찌푸리고 있고 정신이 없었다. 누구든 자기 일이 제일 바쁘다는 듯 일을 했고 매사 그걸 주지 시키는 데 혈안이 돼있었다.


 ㅣ 내가 방금 보낸 메일 확인했어?


아침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팀장님이 다가오면 습관적으로 사서함을 클릭했다. 1 전에 보낸 메일은 새로 고침을   눌러야 확인됐다. 막상 읽어보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 팀장님은 엄청나게 우선시되는 일인 것처럼  흥분한  말을 이어나갔다. 데스크에  방울의 침이 튀었다. 이렇게 직접 말로 읊어주실 거면   아프게 메일을 보냈는지 아이러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며칠하고   . 엄청나게 대단한  하고 있는  아니지만 바쁘고 대단한 일을 하는  마냥 일해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는  알게 됐다.  이후부터 나는 챗봇이 됐다.


 ㅣ 내가 방금 보낸 메일 확인했어?

 ㅣ 네, 지금 봤는데요. 바로 하겠습니다.


 자주 염증이 났다. 똑같은 입력값을 내보내는 것에 신물이 날 때마다 이번 달 들어올 월급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참아냈다.  


 ㅣ 하, 또 회의 들어가야겠다. 바쁘겠지만 잘 부탁해.  

  

의례적인 말을 건넨 후 자리로 돌아가는 팀장님에게 가끔은 정말 바쁜 사람은 바쁘다고 말할 틈도 없어요 대들고 싶어지기도 했다. 이런 내가 한숨이 나와 주변 사람들은 어떨까 돌아보면 모두들 비슷했다. 넋 나간채 검색창을 보고 있거나 쇼핑몰에서 육아용품을 살펴보거나 모바일 게임을 하는 사람들.  왜 우린 굳이 일이 없는데도 8시간 동안 여기 앉아 일을 해야 할까. 남의 돈을 번다는 것은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이며 여유로움도 바쁨으로 포장해야 되는 것일까. 버텨내는 것도 능력이라는 걸 깨달아가며 나는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쿠마


사이판에서 만난 쿠마(Kuma)는 이런 내 생각에 다윗처럼 돌을 던진 친구였다. 단언컨대 내가 만난 사람 중 세상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친구가 쿠마였다. 쿠마는 이 곳 원주민으로 어려서부터 사이판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산 타는 걸 좋아해서 몇 년째 트레킹 투어 가이드로 일을 하고 있었고 나 또한 포비든 아일랜드 트래킹 투어를 통해 가이드와 손님으로 쿠마를 만났다.


쿠마, 나, 한국인 커플 남녀, 이 세명이 그때 투어를 같이 하는 인원 전부였다. 사이판의 트레킹 투어는 보통 도심에 위치한 여행사 사무실에 먼저 리뷰를 진행한 후 옷을 갈아입고 구명조끼나 스노클 같은 장비를 받아 차로 이동했다. 사무실에서 차로 한 시간 가량 가다 보면 열대 우림으로 둘러싸인 산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포비든 아일랜드 트레킹이 진행됐다. 커플과 함께 가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게 됐고 운전석에 앉은 쿠마와 대화를 많이 나눌 수밖에 없었다.


ㅣ 엘레나,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아. 지금 이렇게 산 타는 거 좋거든. 끝나고 저녁엔 술 마시고. 돈이 많으면 신경 써야 할게 많아지잖아.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워낙에 서글서글한 친구라 유머처럼 듣고 넘겼다. 생긴 건 영화 모아나의 남자 주인공 마냥 배가 불룩하게 나왔으며 만화 캐릭터처럼 실없는 농담을 곧잘 하는 친구였다. 자기 여자 친구가 되면 산 타는 건 일도 아니라며 능글맞은 농을 할 때도 있었다. 적막한 차 안에 잠시나마 작은 웃음이라도 감돌 수 있어서  웬만한 농담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겼다.


차로 한 40분 정도 갔을까. 운전대를 잡은 쿠마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콜이 올 것 같았다. 열대지방엔 스콜이라고 때 아닌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하늘이 맑더라도 저 앞에 보이는 곳이 흐리다면 벼락이 치거나 비가 오고 있을 수 있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흐린 하늘색이 더 짙어졌다. 투어 시작 전에 날씨가 안 좋으면 취소될 수 있다고 안내받았던 게 불현듯 떠올랐다.

트레킹

등산로 초입에 도착해 차에서 막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길 몇 분, 쿠마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냥 등정하자는 거였다.

 

ㅣ 위험하지 않을까? 할 수 있겠지?


쿠마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우중 트래킹이 시작됐다. 이 빗속에 열대 우림 트레킹이라니 흡사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찍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서 발이 푹푹 빠졌고 산길은 미끄러웠다. 수 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번 넘어질 때마다 흙탕물 속에 숨어있는 자갈이 송곳처럼 튀어나왔고 밟으면 발바닥부터 지릿하며 온몸이 아팠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쿠마는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ㅣ 할 수 있잖아. 일어날 수 있어. 여자 친구는 강하잖아.


그 말에 부응하듯 몸에 묻은 흙탕물을 털어내며 번쩍번쩍 일어났다.


 ㅣ 역시 쎄. 가방 들어줄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똑같이 힘든데 굳이 내 짐을 이 친구에게 나눠가지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쿠마는 쉬지 않고 앞장서 나아갔다.


 얼마나 갔을까. 우리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좀만 쉬자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가야 되냐 묻는 경우가 생겨났고 빗방울은 거세졌다. 쿠마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에게 좀만 더 힘내라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줬다. 길게 드리워진 수풀을 꺾어가며 길을 냈고, 자주 뒤를 돌면서 우리들의 안전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얼마 후, 고생 고생해서 동굴에 도착했는데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마냥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밖은 비가 쏟아지는데 동굴 안은 조용했다. 단 그늘이 져서 그런지 기온이 바깥보다 훨씬 더 춥긴 했다. 비를 쫄딱 맞은 상태라 씻고 싶었지만 추위 때문에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쿠마가 동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에게 물을 뿌리며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하나둘 그 물속에 발을 담갔다. 마침내 모두가 물에 몸을 담그자 쿠마가 갑자기 스노클을 끼라고 했다.

트레킹 동굴


그러더니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밖으로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는데 걱정되는 마음에 밑을 내려다봤다. 내려다본 물 밑엔 도넛 모양의 버블이 보였다. 처음엔 동그란 도넛 모양이었던 버블이 위로 올라올수록 엔젤링이 됐다. 나중엔 행성의 띠처럼 크고 뚜렷해졌다. 우리들은 숨죽인 채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스노클 장비를 쓴 채 수면 위에 동동 떠서 심해를 보는 모습이란 마치 SF 영화에서 처음 우주에 당도한 우주비행사들을 보는 것과 같았다. 비록 우리가 보는 우주는 저 깊은 동굴 밑바닥에서부터 쿠마가 잠수하며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버블이라는 사실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쿠마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래로 내려가길 반복했다. 숨을 한번 크게 마시고 들어갈 때마다 동굴 저 밑바닥에서부터 엔젤링이 올라왔다. 우리에겐 보글보글 게임처럼 재밌는 일이었지만 쿠마에겐 고역이었을  분명했다. 위도 잊은 채 20분 넘게 그러고 있었을까. 쿠마가 지친 몸을 근처 바위에 뉘었다.

버블


ㅣ버블 어땠어?


머리에 물기를 털어내며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가 세상 호탕하게 웃었다. 불현듯 아까 차 안에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져서 싫다는 말. 세상만사 초월한 것처럼 말했지만 진짜 한량이라면 이러지도 못할 텐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애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우리한테 하듯이 다른 사람한테도 했으면 이미 특급 가이드로 떼돈을 벌었을 것 같은데. 


ㅣ 쿠마,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좋지 않아?


쿠마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서 내가 뭘 모른다는 투로 답했다.


ㅣ 난 산이 좋아. 물론 술도 좋고. 이렇게 산 타서 번 돈으로 끝나고 술 마시면 되지 꼭 돈이 많아야 해? 부자가 되면 그 돈을 지킬 걱정, 돈 때문에 붙는 사람들. 모두 신경 써야 하잖아. 쿠마는 그런 거 귀찮아.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쿠마가 물을 한차례 뿌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르튼 맨발이 맨 먼저 보였다. 구멍 뚫린 트레킹화가 바지 주머니 춤에 대충 끼워져 있었다. 오는 길에 저 트래킹화 구멍에 자갈이나 나무뿌리가 자주 걸렸었다. 대체 저 신발 하나로 얼마나 산을 탔으면 트래킹화에 구멍이 다 뚫렸을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누구보다 씩씩하게 산을 오르던 사람이었던 게 떠올랐다.


쿠마가 맨 앞에서 나뭇가지와 수풀을 탁탁 쳐내 줄 때마다 나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고 그는 아주 큰 사람이 됐다. 거침없는 전진, 힘든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가이드 능력은 쿠마를 한없이 빛나게 해 주었고 그것은 곧 우리 사이에 신뢰로 이어졌다.

돌아오는 길에도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우리 모두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쿠마 또한 여전히 웃는 상이 었다.


ㅣ 쿠마 넌 어떻게 이렇게 행복해? 안 힘들어?


내가 묻자 쿠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ㅣ 그냥. 내가 웃으면 너도 웃잖아. 네가 웃으면 같이 있는 나도 웃을 수 있고.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ㅣ 그래야 투어가 재밌고. 재밌으면 또 올 거고, 그렇지 않아, 엘레나?


말투는 여전히 농담조였지만 눈빛은 총기 넘쳤다. 처음으로 머리에 약간 혼란이 왔다. 생애 첫 트레킹이 이렇게 괴상한 날씨에 진행된다는데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매사 농담과 능글맞은 행동이 넘쳐나는 이 친구에게 내가 암암리에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 짧은 순간이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 친구의 느긋한 성격, 인내심, 신묘한 묘기가 없었더라면 트래킹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었는데도 우리는 도착지에서 모두 웃을 수 있었다. 이걸 보면 한 명의 개인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력이 무궁무진하게 커질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외부 환경이 어떻든 결국 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지 않을까...


사실 회사 풍경이 너무 싫다고 탓하면서도 어느샌가 나 또한 그 안에서 판화 찍어내듯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설렁설렁 일하는 회사원이 되기보다 쿠마처럼 노동을 즐기고,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노력하는 일상을 살아내면 어떨까? 그럼 돈이 좀 부족하더라도 더 행복하지 않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모두들 쿠마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뒷자리 커플은 인생 다시없을 투어였다고 손뼉을 쳤다. 쿠마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다들 한껏 노곤해진 몸으로 쓰러지다시피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갑자기 쿠마가 자신감에 찬 얼굴로 날 보더니 내 무릎 위에 놓인 핸드폰을 콕콕 가리켰다.


ㅣ엘레나. 예전에 트레킹 왔던 한국인 친구가 얼마 전에 또 왔거든? 날 인터넷에 올렸다 하더라고. 한국에서 쿠마라고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던데?  


궁금증이 일었다. 쿠마를 찾아봤지만 안타깝게도 후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옆을 힐긋 보니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쿠마가 보였다. 그때, 본의 아니게 없는 말을 지어내버렸다. 


 ㅣ  오~ 쿠마 많이 나오는데?

쿠마는 역시 그렇냐는 듯 호탕하게 웃더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방탄소년단의 Fake love였다.

차는 빗길을 쏜살 같이 미끄러져내려 갔고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나는 콧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이 순간도 또 금방 지나가버리겠지.  그렇지만 잊지 않겠다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겠다고. 다음에 다시 사이판에 오게 된다면 한국 소주를 들고서 "내가 SNS에 너를 남겼어." 쿠마에게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핸드폰을 꽉 쥐었다.

 




꼭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게 성공한 삶은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생각하는 대로 살며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사는 삶,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자유가 있는 삶, 변명도, 후회도 없는 삶. 의미 있고 신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삶... 이처럼 꿈은 저마다 다르고 성공의 정의도 제각각이다.


- 할 엘로드 《미라클 모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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