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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허리가 없어

나부터 내 몸을 사랑하기  

157cm에 43kg 시절에도 나는 허리가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말라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쩍 말랐었는데 왜 허리는 없었는지 모르겠다. 소위 말해 선천적 일자 허리라 해야 할까. 살이 찌든 빠지든 상관없이 체형이라는 건 참 정직했는데 한 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허리 라인 잡아주는 요가 동작을 아침저녁으로 자주 했었다. 반년을 지속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갑자기 내가 미란다 커처럼 길고 가녀린 모델이 될 수 없듯, 없던 허리 또한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허리가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 같은 생각에 응원을 보태준 건 크로스핏이었다. 신기하게도 크로스핏에서는 허리가 없다는 게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작용됐다


"슬기는 허리가 없어서 잘 들지. 햄스트링도 봐. 크로스핏 하기 최적의 몸이야."


코치님은 오늘도 내 허리에 대해 논했다. 박스에 하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에이트(8eight)의 심장이 없어를 굳이 틀어가면서. 심장이 없어 가사에서 정확히 심장 부분만을 허리로 바꿔서 노래 부르다가 돌연 나를 보며 내 주제가라고 말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짓궂은 코치님의 장난 때문인지 회원들도 요즘 내 허리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무게 드는 운동이 나오는 날이면 오늘은 슬기 운동이지, 슬기는 허리가 없잖아라는 얘기를 꼭 빠짐없이 했다. 놀리지 말라고 툴툴대면 박스에서 코치님 다음으로 운동 잘하는 오빠가 한마디 했다.  


"허리 있어서 뭐해. 세계적인 선수들은 다 허리 없어. 너는 가능성이 있는 거야."


순간 진짜 진심처럼 말해서 속아 넘어갈 뻔했다면... 오산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가. 내가 크로스핏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보다 앞서 크로스핏으로 한국 1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단지 허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펼쳐질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상상의 나래들을 거둬내고 나면 웃기도 뭐하고 울기도 뭐해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난 쩌리짱인걸?"


허름하지만 사실이었다. 크로스핏을 이년 가까이 해왔지만 딱히 뚜렷하게 이 운동을 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드리프트(Deadlift), 쓰러스터(thruster)와 같은 역도 동작은 남들보다 좀 더 잘 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역도 동작이 다른 종목에 비해 수월했다. 재능이었다. 원래부터 힘이 셌고 매일 운동했기에 지금은 예전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잘하는 동작보다 못하는 동작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나보다 운동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트 낀 바벨을 번쩍번쩍 들어 올릴 때면, 칭찬하는데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는 크로스핏터들이 어김없이 나를 하늘로 띄워주었다.  운동 잘한다, 들어 빵이다. 그런데 이런 칭찬을 들으면 달리기를 잘했을 때 듣던 칭찬과는 느낌이 이상하게 달랐다. 원래 엄청 못했다가 계속해서 뛰다 보니 잘하게 된 달리기와 날 때부터 힘이 센 아기장수 우투리 느낌은 아무래도 갭이 너무 큰 것이다. 아무래도 잘한다는 건데 왜 이렇게 온도차가 나는 것일까.


다시 모든 건 내 허리로 귀결됐다. 나는 정말 허리가 없어서 이렇게 힘을 쓰는 운동을 잘하는 걸까. 하소연하듯 수업 시간에 내 일자허리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이 운동하던 오빠가 일침 했다.


"갖고 있는 게 좋은 거야. 양키 언니들도 다 없다고."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허리 없음을 갖고 싶다며 점심 반을 담당하는 코치님이 옆에서 조미료를 보탰다. 비록 나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나의 오픈 랭킹은 세계 순위권에서 저 아래 먼지처럼 깔려있지만 그래도 허리 라인은 동일하다는 것. 그래, 이쯤 되면 위로해볼 만도 했다. 생각이라는 거. 결국 한 끝만 바꾸면 이해할 수 있는 거니까.


그 후로 며칠을 생각하다가 나는 내 허리에 관한 웹툰을 인스타그램에 웹툰으로 올렸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눈팅만 하며 댓글을 달지 않던 언니 오빠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기가 차다며 폭소를 했고 친구, 오빠, 동생들이 귀엽다, 재밌다며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댓글이나 메시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피식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웃음을 준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로 즐겁냐면 조금 뻔뻔하지만 허리가 없다는 게 장점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게 뭐야...라고 친구가 보낸 메시지에 내 허리 얘기라며 밝게 대답할 수 있었고 코치님 신고해야겠네라고 댓글 단 친구에게 그러는 넌 왜 웃니라고 당당하게 응수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 사실 하나, 나는 이제 내 일자 허리가 더 이상 콤플렉스가 아니게 돼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허리 없음은 이제 그냥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 같은 게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신승리는 어디까지나 크로스핏이라서 가능한 영역이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마마무 화사 얘기를 다룬 기사를 보았다.


“오디션 때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넌 개성도 강하고 노래도 잘하지만 예쁘지가 않다.”


당시 큰 충격을 받았던 화사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이런 다짐을 했다.


“이 시대가 말하는 미의 기준에 내가 맞지 않는다면 내가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겠다.”


이때의 각오가 터닝포인트로 작용하여 지금의 화사가 탄생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요즈음 화사는 개성 있어서 외려 더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누구도 화사한테 못생겼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건강미의 대명사라 불리며 그룹 활동에서도 솔로 활동에서도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결국 미의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예뻐야 한다”라는 생각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어서 문제가 됐다. 바꿔야 하는 대상은 나인데 시선은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 향해있으니 엉뚱한 곳에서 문제를 찾는 이었다. 스스로 예쁘다고 느껴야지 내 인상도 내 행동도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인데, 게다가 자신감 있는 사람은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아름답게 보이는 인데. 우리는 때로 너무 많은 시선들에 둘러싸인 채 이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고로, 나는 내 허리를 사랑한다. 내 허리를 위해 앞으로도 크로스핏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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