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 Nov 17. 2019

왜 운동하는데 살이 안 빠지지?

맛있게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크로스핏터

이제 막 운동을 마친 오빠가 뒤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걸어 나왔다. 벌써 이 박스에서만 수년째 운동하고 있는 40대 오빠였다.


"아, 오늘 멸치들 운동이었어. 햄버거 세 개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네."  


오빠 말을 듣던 또 다른 오빠가 뒤에서 나오더니 대답했다.


"암. 당연하지. 우리는 잘 먹어야 잘 들 수 있어."


만담처럼 이어지던 둘의 대화는 어느새 셋이 되고 셋은 넷이 되어 회원들은 이제 진짜로 골똘히 점심 메뉴를 정하기 시작했다. 바벨 떨어트리는 소리와 가쁜 호흡소리만 가득했던 박스는 언제부터인가 먹는 얘기로 떠들썩해졌다. 운동을 더하기 위해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아는 크로스핏터였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성인병이 의심될 만큼 뚱뚱하냐? 아니, 누구보다 건강했다.   




크로스핏을 시작하고부터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우선 내가 먹는 걸 정말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더 어릴 때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한때 대한민국에 요가 열풍을 일으켰던 핑클 멤버 옥주현이 어차피 먹어봤자 다 아는 맛이라는 다이어트 명언을 말했을 때도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음식이란 본래 아는 맛이니까 더 먹고 싶은 거였다. 펄펄 끓여 나오는 국밥을 한 스푼 떠먹었을 때 입안에 남는 진득함, 앙 하고 베어 물었을 때 패티와 치즈 그리고 야채와 빵의 조합이 기가 막히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게 내가 아는 햄버거의 맛인데. 익숙하고 아는 맛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건데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항상 다이어트에 실패했다. 다이어트는 평생 하는 거지 같은 말이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을 만큼 매년 계획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다행인 건 크로스핏을 시작한 후부터는 강박증적인 다이어트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체중계 보면서 비명을 지른다거나 폭식하고 나서 화장실 가서 토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게 됐다. 일반 성인 기준량을 초과하는 고강도 운동을 매일같이 해내다 보니 체중 감량에 초연해진 것이 분명했다. 세끼 밥 챙겨 먹듯 크로스핏을 한 지 어언 2년, 인 바디를 해보면 전신 근육량은 이미 표준 이상을 훌쩍 웃돌았다. 흐물흐물하게 처져있던 살들은 전체적으로 다부지고 건장한 체형으로 바뀌었다. 체력은 물론 이전보다 훨씬 좋았다.


좋아진 체력만큼이나 입맛 또한 더 살아났다. 매일 운동하는 크로스핏 박스 주변에는 나만의 프라이빗한 맛집 지도가 있는데 생각하면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국밥집, 햄버거 가게, 김치찜, 만둣국... 크로스핏을 오래 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있듯이 이 맛집 지도 또한 먹어보고 실패하고 또 먹어보는 노력 끝에 체화된 훈장 같은 거였다.


"여자 애 손인데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냐. 그립은 차고 운동하는 거냐."


이따금 이 훈장을 보고서 뭐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여자애라는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가족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면 새삼 얼떨떨하기도 했다. 우리 엄마가 언제 내 손바닥을 보고 걱정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주 옛날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손이 이게 뭐냐고 살살 좀 하라고 다그쳤던 엄마 앞에서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너무 좋아! 재밌고! 스트레스 풀리고! 운동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몰랐어."


운동을 오래 하지 않는 사람에겐 굳은살이 영 낯선지라 엄마는 꼭 그렇게까지 운동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철봉을 이용하는 운동이 자주 나오므로 하다 보면 자연히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생겼다. 손을 보호하는 그립을 차더라도 매달려있는 시간이 길거나 횟수가 많아지면 손바닥이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2년째 이 운동을 하다보면 손바닥이 까져서 피가 나는 건 익숙했다. 아프다고 엄살 떨기에는 너무나 오래 했고 징징댈 시간에 상처가 금방 아무는 듀오덤을 붙이거나 굳은살을 떼어내는 콘 커터칼을 사는 게 더 현명할 일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 운동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겠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뭘 하든 재미가 없으면 도통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아이였다. 반대로 재밌으면 질릴 때까지 놓지 않았다. 두꺼운 문학 전집을 읽을 때도 펼치면 앉은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어야 했고, 좋아하는 음악이면 한곡 당 백 번씩 듣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커서도 이러한 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대학 때 정말 가슴 깊이 존경했던 교수님이 있었다. 이 분의 강연은 모두 다 재밌었지만 그 중에 특히 니체의 운명애(amorfati) 수업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때 배운 가치관을 마음에 새기고자 왼팔에 타투까지 했다. 이런 나를 제일 가까이에서 봐온 게 엄마였다. 관심 있고 재밌어하는 것이라면 환장하는 딸을 더는 말리지 못할 거란 걸 알았는지, 엄마는 그 후로 내 손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은 빠졌니? 더 건강해졌어?"


대신에 이상한 질문을 했는데 나는 엄마에게 도리어 반문다.


"엄마. 운동을 꼭 살 빼려고 해야 하는 거야?"  


한숨과 함께 알만하다는 듯 덧붙이는 말.


"우리 딸이 그러면 그렇지. 너 좋아하는 거 해야지. 끊자 그래."


집을 나와 혼자 산지 10년째, 나는 꽤 독립적인 인간이었고 엄마 또한 내 딸이 하고 싶은 건 하고 살길 바라는 주의였다. 평생 그토록 얽매였던 여성으로서의 삶을 떠나 너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왔고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났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통화할  밥은 먹었니라는 말보다 오늘도 운동 갔다 왔니라는 말을 더 자주 다. 응 점심에. 아니 이제 가려고. 그럼 나는 보통 두 가지 형태로 대답하곤 했는데 이젠 너무 일상적이라 가끔은 밥 먹었니라는 말만큼이나 재미없게 들릴 때도 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서른에 접어들었고 선천적 돼지력을 잡아 보려고 한 때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는 내가 다이어트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이 년째 이 운동을 계속하는 이유 또한 알고 있다. 삼십 년째 먹는 걸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리하여 타인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나와 먹을 때 행복한 나, 운동할 때 누구보다 기쁜 나. 이 모든 게 나라는 사람을 정의한다면 결국 나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다이어트에 실패할 것이다.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예전엔 왜 그렇게 먹을 때 행복한 나를 억누르고 제어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여리 여리하고 보호 본능 자극하는 여자가 예쁘다는 사회적 기준 때문이었겠지. 다행히 서른의 내겐 운동을 더하기 위해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크로스핏을 꾸준히 할 예정이다. 운동의 목적은 결국 운동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전 15화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