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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공정한 운동 크로스핏

크로스핏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좀 더 잘하고 싶다고 해서 거저 주어지지 않고 오래 했다고 해서 에누리가 있지도 않다. 아부하면 올라가는 직장이랑 참 다르다.


2년 전 이맘때쯤 이전 상사가 『회사 생활 잘하는 방법 백 00가지』라는 책을 선물해주겠다고 꼭 한번 읽어보라고 말했다(몇 가지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넌 일하는 거 다 좋은데 회사에서 지켜야 할 것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회사란 말이야.로 시작되는 그분의 낮은 음성과 미간 좁힘을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착잡한 마음에 퇴근하고 서점에 갔다.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 책을 샀다. 얼마간 사무실 책상 위에 꽂아 놓았던 그 책을 지인에게 선물해줄 때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좀 더 나아졌다. 결과 보고서 쓰던 게 상사 눈에 들어와 운 좋게 임원보고를 하게 됐고 회사 생활 잘하는 방법  몇 가지라는 책 대신, 먹고 싶은 거 비싼 걸로 사 먹으라는 법인카드를 받았다. 그즈음 대표님이 신경 쏟는 직원으로 내부 인지도가 올라갔고 보고서가 공유되어 본사와  그룹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됐다. 나는 그때 미약하게나마 내가 회사생활을 잘 해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 생각했다.


어디에나 갑을이 만연한 이 네모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을인 나는 어디까지나 시스템에 복종해야 했다. 갑의 니즈에 맞는 일을 눈치껏 찾아서 그럴싸하게 해내는 수밖에... 갑이 그걸 봐주지 않는다면 갑의 갑에게, 갑의 갑이 원하지 않는다면 갑의 갑의 갑에게 맞춰서 일해야 꾸역꾸역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느 날엔가 대표가 알라딘 영화에 꽂혀있다 들으면 그것과 연계된 소셜 콘텐츠를 만들어 이슈화시켰고, 상사가 돈 없이 마케팅하고 싶다 말하면 제휴 바터를 통해 경품을 받아 프로모션을 만들었다. 매 순간 부단히도 열심히 했다. 계약직으로 시작한 직장이라 회사에선 을 중의 을이었고, 꼰대들이 많은 팀에서 막내 때부터  일도 내 일, 네 일도 내 일 호구처럼  일해왔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건 마케팅 일이 적성에 잘 맞았고 운 좋게도 매번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천직이라 여길 만큼 결과가 예상보다 좋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늘 도돌이표였다. 일 때문에 나아질만하면 "다 좋은데 회사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허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행여나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예 뛰어넘을 기회조차 없어져 버리는 그런 허들. 열심히 달려가다가도 끝도 없는 허들을 마주하게 되면 이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닌가 보다.


기가 막히지만 사실이었다. 회사원에게 일이란 단순 과업이 아니라 라인 타기, 아부, 쇼잉이 모두 포함돼 있어야 했는데 나란 사람의 DNA는 철저히 그것들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상한 걸까. 회사가 이상한 걸까. 생각하면 끝도 없었다. 일보다는 갑을 관계에 촉각을 세워야 하는, 을 중의 을이라 서럽고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벌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돌파구가 필요했다.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여기서 내가, 이보다, 무엇을, 더.라고 생각했을 때 만나게 된 게 크로스핏이었다. 어쩌면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크로스핏 박스는 마치 대나무 숲 같은 존재였는데 그렇다고 동화 속 임금님처럼 여기다가 구구절절 회사 생활의 힘듦을 토로하진 않았다. 그냥 열심히 운동했다. 그러다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무아지경으로 운동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었고 그럼 그 순간은 한없이 행복해졌다. 하루에 딱 1시간 땀 흘린 덕분에 나머지 23시간이 좀 더 가치 있어진다 해야 할까.


"운동 열심히 하면 도파민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분비돼요. 도파민이 쉽게 말해서 흥분, 쾌락 이런 건데 이게 중독임. 마약 같은 현상이라 못 끊는 거야. 담배, 술 못 끊는 사람처럼!"


언젠가 운동을 오래 한 회원 분이 내게 말해준 도파민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크로스핏을 하고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좋아도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크로스핏이란 운동은 보통의 운동과 달리 팀 단위로 수업을 들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운동 효과를 내야 하기에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다. 매일 바뀌는 운동만큼이나 격렬히 움직이는 사람들 틈 바구니에 껴있으면 내 안에 잠들어있던 도전 정신과 성취욕 또한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뭐만 하면 안 된다는 직장과 달리 끝도 없이 할 수 있어! 하나만 더! 돼! 를 외치는 문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건강한 스포츠였다. 어쩌면 내가 회사에 바란 것도 이런 선의의 경쟁이었을지 모르겠다.


탈진 상태로 누워있으면 어김없이 칠판에 기록을 새기는 시간이 돌아왔고 거기 적힌 이름과 숫자를 보다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마냥 뿌듯하고 기운이 났다. 매번 새롭지도, 매번 성과를 낼 수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게 크로스핏 기록이란 꽤나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한 만큼 결과 또한 투명했다. 그리하여 매번 늦어서 혼날까 봐 달음박질쳐가며 회사로 복귀하면서도 점심시간마다 크로스핏 가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나는 2년째 매일매일 밥 먹듯 크로스핏 박스에 가고 있다. 퇴사는 아직도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돌파구는 찾았고 이상하다 생각하면 더 이상해지는 곳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알게 됐다. 일 잘해도 여러 요소 때문에 승진 못하는 직장에서와 달리 기록은 늘 한 만큼 결과를 건네주었고 공정하고 정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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