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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나는 유노윤호다

크로스핏터의 열정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엔 열정 만수르들이 참 많다. 확실히 유노윤호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운동하는 기쁨이 있다.


너 또 웹툰 소재 찍지? 그거 요즘 더 재밌어졌더라.


나는 입꼬리 올라가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말한다.


언니 오빠들이 모두 주인공이 될 때까지 계속 그릴 거예요


주말마다 고생해서 그린 웹툰이 재밌다고 말해주면 기분이 참 좋다. 주변에 좋은 걸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 나의 열정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니까.


생각하건대 열정은 사실 좋아해야 나오는 것이다.

유노윤호를 빌려 왔지만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미친 듯이 하는 걸 열정이라고 부르진 못하겠다. 다만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더 열심히인 건 열정이라 부르는 게 맞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어떤 일에 열정 쏟는 걸 바라보는 게 좋았다. 열정을 아무 데나 남발하는 사람 말고 좋아하는 게 뭔지 뚜렷이 알고 거기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빛이 났다. 그 빛에 머리를 묻고 가만히 있다 보면 내가 뭘 할 때 심장이 뛰는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언젠가 A라는 오빠가 이번에 나오는 회사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장기 프로젝트라 크로스핏도 못 나올 텐데.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지금처럼 저녁 늦게도 못 올 수 있다며 비통해하는 오빠를 보며 아... 이 오빠는 정말 크로스핏을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 회사에서 회식하고 나서도 저녁 9시 반에 운동 올 정도니 이미 말은 다했다.


B 오빠는 늘 점심시간에 운동을 왔다. 회사를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시간적인 여유가 철철 흘러넘쳤다. 오빠네 회사는 왜 이렇게 좋아?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 한 번은 부러워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니, 나만 이런 거야. 시크한 답변을 받았다. 정말로 회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운동은 늘 수업시간 10분 전에 와서 준비운동을 하고 칠판 기록도 항상 최고 기록을 남기는데 말이다. 오빠는 매년 우리 박스 최상위권 순위로 랭크됐다. 최근에는 결혼도 했는데 신혼집을 박스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로 잡았다. 신부가 이사 와서 제일 먼저 한  또한 크로스핏 박스를 등록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 분의 열정도 이 정도면 말은 다했다.


C 언니는 회사가 힘들어 퇴사하고 싶다고 자주 다. 사내 문화적응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크로스핏 박스에서는 누구보다 사교적인 언니였다. 나이 많은 오빠들은 이 회원 저 회원 살뜰히 챙기는 언니를 칭찬했고 또래, 동생들도 C언니를 잘 따랐다. 이런 언니가 대인 관계를 어려워한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했다. C 언니 또한 이번 오픈(크로스핏 공식 대회) 기간에 연차 내고 링거 맞고 기록을 재 측정할 만큼 크로스핏에 한해서는 프로 유노윤호였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모두 있는 열정, 없는 열정을 크로스핏에 쏟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운동, 잘하고 싶고 오래 하고 싶은 것을 지켜내려고 부수적인 생업을 이어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회사에서는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애 때문에 일하지.

이 나이에 퇴직하면 친구들 보기에 면도 안 서.


누군가는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누군가는 사회 관계망 때문에 생업을 이어가나 생각하다 보면 불현듯 나는 그럼 뭐 때문에 회사를 다니나?  때문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회사 안에서의 마케팅은 하면 할수록 삽질하는 기분이 들었고, 요즘엔 성장한다는 느낌보다 정체된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일의 기쁨보다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슬픔이 더 커져버릴 경지에 올라버렸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운동하는 공간에서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정을 쏟는 대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상이 만들어낸 가치를 영위해 나가기 위해 싫어하는 일, 억울한 일, 화나는 일을 꾹꾹 눌러 참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럼 나는 뭐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가?

 



책상을 들다가 손가락이 다친 후로 꼬박 일주일 동안 크로스핏을 쉰 적있었다. 매 점심시간마다 크로스핏 박스에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건강해야 크로스핏 더 오래 할 수 있잖아.'


밥솥에 뜸 들이듯 애써 나를 다독였다. 아픈 왼손 새끼를 쥐었다 폈다 자체 치료하며 오기로 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던 그때, 산책도 해보고 맛집도 가봤지만 마음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음식을 아무리 채워 넣어도 속이 허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월화수목이 가고 금요일이 왔다. 더는 못 참겠다는 마음으로 커피를 사들고 박스로 갔다. 박스 문 앞에는 큰 소파가 놓여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멀찌감치서 사람들이 운동하는 걸 구경했다. 한창 수업을 듣고 있던 친한 오빠가 날 발견하고 이리로 다가왔다.

 

손가락 다쳤다고? 두 손가락으로도 오늘 운동은 할 수 있어.


그러고서는 내 눈 앞에서 두 손가락으로 풀업(턱걸이)을 했다. 너무 잘해서 헛웃음만 나왔다. 원숭이처럼 철봉에 매달린 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데 순간 나도 두 손가락으로 풀업 할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멀쩡할 때 열 손가락을 다 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게 풀업이었다.


슬기 왔어? 운동할 거면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뒤에서 코치님이 우릴 보며 크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일주일을 쉬다 왔는데도 모두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너무 못 가서 얼굴 잊어버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싶을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다며 손사래를 쳤다.

 

얼마 안 가 운동이 시작됐다. 처음으로 이 시간대에 운동을 하지 않고 밖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한 개라도 더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풍경이라니.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여길 왜 그렇게 오고 싶어 했는지. 나 또한 생업을 이어가는 이유에 크로스핏이 있다고. 내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게 크로스핏이라고 눈과 머리가 알려주고 있었다. 


김연아가 피겨 할 때 멋있고 장미란이 도할 때 멋있듯 사람은 자기 한계에 도전할 때 무한히 아름다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 관람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크로스핏에서는 매번 그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었고 덕분에 심장이 쫄깃해질 수 있었다.


그주 주말을 보내고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다시 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내가 잘하는 역도 동작이 나왔다. 손가락이 다 나았나 염려되는 마음에 무게를 가볍게 했는데 지난주에 풀업(턱걸이) 시범 보이던 오빠가 어느새 옆에 와서 또 잔소리를 했다.


열심히 해. 쉽게 하지 말고.

솔직히 너 더 할 수 있는데 손가락 아프다고 휴대폰 무게만 한 걸로 운동할 거야?

그러더니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손목 아파서 회사에서 마우스도 안 눌러질 때 크로스핏 하러 왔었다고 하는데, 무슨 이런 꼰대가 다 있나 싶다가도 입꼬리가 왜 이렇게 올라가는 걸까? 사실 두 손가락만으로 연속 풀업을 해낼 정도면 보통 독해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평소 이 사람의 성품을 알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아니까. 이 오빠라면 정말 마우스도 안 눌러질 때에도 박스에 왔었을 거라고 믿으니까 까짓 거, 나도 더 해본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무게를 더 올렸다.


어이, 12시 반 에이스들~


한참을 옥신각신하며 무게를 올리고 있는 와중에 뒤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11시  운동하고 난 후 아직 마무리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오빠들이었다. 이분들도 정말이지 프로 열정러였다. 평균 나이 마흔이신 분들이  집에 가지 않고 박스 뒤쪽에 그룹 지어서 마무리 운동을 했다. 복근 운동이나 어깨 운동, 스트레칭과 같은  보강운동이었다. 고강도 운동이 끝난 다음에 또 다른 운동을 한다는 건 박수 받아야 할 태도였다.  

가끔 내가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면 이건 그냥 생존의 문제라며 웃어넘기곤 했다.


우린 살려고 운동하는 거야.

중년 남성들의 비애라고. 이렇게 관리해야 된다?


그런 모습이 또 더 멋있었다. 라떼는 말이야를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어른들보다 백배 낫지 않은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오빠들이 나를 편하게 대해줄 때면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11시 반 오빠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코치님이 저만치서 날 불렀다.


또 수업 집중 안 하고 산만해진다


그럼 난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코치님께 달려갔다.


집중하겠습니다!


코치님도 웃고 손가락 두 개로 풀업 하는 오빠도 웃고 11시 반 오빠들도 웃고 뭔가 진짜 화기애애한 시간이랄까. 더욱이 그 주의 월요일은 더 좋게 느껴졌다. 오래 쉬다가 나오니 열정 넘치는 사람들 속에서 운동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국 나 또한 열심히 하게 된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 좋은 커뮤니티는 결국 나 또한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유노윤호들이랑 한 공간에서 운동하는 기쁨이 참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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