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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비난할 거면 칭찬할 거 다섯 번 생각하고 해 줘

상처 받은 마음엔 크로스핏 마데카솔

"너나 나나 다 부품이야. 나는 이 부품들을 윤이 나게 잘 맞추는 일을 하는 거지. 혹시 이 부품이 잘 안 맞아. 그러면 난 그것만 들어내서 혼자 돌아가게 할 거야. A과장이 지금 그런 케이스인 거고."  


들으면 들을수록 맥이 빠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부품이라는 관습적인 비유 때문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부품이야라고 말하는 상사를 보면서 왜 굳이 말을 저렇게 하는 걸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자기 자신까지 깎아내려가며 말하는 게 좋은 걸까 싶다가도 행동은 부품이 아닌 기계 다루는 사람처럼 하는 상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돌릴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여러 해 재직 중이니 앞으로 몇 년 후면 내가 임원이 될 거야, 내가 매일 쫓는 실장님도 곧 자리를 비우겠지. 거길 따라가면 그 자리에 내가 앉고 그 위로, 그 위의 위로 올라가게 될 거야."


무엇에서인지 확신에 찬 눈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얼굴을 보면 내가 사회생활을 못하는 이유를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 죽어도 저렇게는 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얼마 전 책에서 봤는데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오늘 부품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인간적이란 말을 다섯 번 더 들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모든 호운과 모든 좋은 요소들이 따라줘서 상사가 정말 자기가 바라는 위치에 앉게 됐을 때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그때의 내 모습도. 얼른 방향을 돌리라는 듯 눈 앞에서 깜빡이 신호가 깜박깜박 울리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7시 반 크로스핏.  언니 오빠 동생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준비운동을 하는데 자꾸만 부품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몸 풀려고 스트레칭하는데 앞에 있는 A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는 거 왜 이렇게 힘들죠"     


 왜인지 모르겠지만 툭하고 진심을 말해버렸다.


"원래 힘든 거야"


언니가 1분도 고민하지 않고서 바로 대답했다.


"태어났으니깐 사는 거지"


인생 통달한 말투였다. 그게 또 이상하게 위로가 돼서 웃음이 나버렸다. 역시 힘들 땐 기승전운동인 건가. 그날의 운동은 곧잘 하는 캐틀벨 (Kettle bell) 운동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또 더 기운이 났다. 회사에서는 그래 봤자 결국 부품이라는 소리를 실컷 듣고 왔는데 여기선 하나만 잘해도 다섯 번 칭찬을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늘 아니에요 라는 말부터 나왔다.


"너 아니에요 봇이야? 왜 잘한다는데 싫대?"


볼 멘 소리로 옆에서 투덜대는 코치님에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다니는 박스엔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에는 부끄러워서였다. 


저녁 운동이 끝나고 나서는 나이 많은 오빠가 말을 걸어왔다. 인스타그램에 연재하고 있는 내 웹툰을 보고 싶다며 핸드폰을 건넸다. 앱을 사용하지 않아서 못 보고 있었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나는 오빠 옆에 앉아 인스타그램 하는 방법을 요목조목 가르쳐 주었다. 일단 앱을 설치했으면 검색창에 ID를 입력하고 좋아요를 누르면 돼요. 설명하다 보니 오빠의 스마트폰 키 양식이 요즘 잘 안 쓰는 천지인 자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재밌어서 살짝 놀렸는데 오빠가 민망했던지 이렇게 말했다.


"퍼거슨 형이 그랬어. SNS는 낭비다. 소셜미디어를 한다는 건 그런 거지."


나는 그런 오빠를 가만 바라보다가 짓궂게 대답했다.


"레논 그랬어요.  즐겁게 낭비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오빠는 흠칫 놀라더니 아... 내가 너무 나이 들어버렸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고서 앓는 소리를 냈다.


"크로스핏 하지 말고 골프 하러 가야겠다. 거긴 내가 제일 어려."


빈말일게 분명했다. 오빠에게 다 됐다고 웹툰을 하나하나 넘겨가며 보여주었다. 표현이 서툴러도 나는 천지인 자판을 쓰는 오빠가 크로스핏을 참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오빠는 골프를 가지 않고 크로스핏 박스에 나왔다. 웹툰 재밌게 잘 보고 있다며 스마트폰을 안녕하듯 양옆으로 흔들기도 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진짜 재밌어요?라고 되물었다. 바라본 핸드폰 화면에는 소셜 앱이 등대처럼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나고 보니 상사도 나를 부품이라 깎아내렸지만 회사에서의 입지를 알고 있기에 대체 불가능한 본체가 되려고 렇듯 아등바등 일하는 게 아닐까. 윗사람들에겐 잘하고 아랫사람들에겐 권위를 내세우며 그게 부품을 잘 조절한다고 여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표현방식은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가령 내가 나이 많은 오빠에게 이걸 왜 못해요? 아직도 이걸 안 써요? 그냥 보지 말아요. 라고 말했으면 상대방은 기분 나빠했을게 분명했다. 퍼거슨 형이 말했던 소셜은 낭비라는 부정적인 말에 덜컥 동의해버렸다면 오빠에겐 웹툰을 보는 즐거움, 나에겐 다시 열심히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는 창작욕 또한 불어넣지 못했을 거다. 이처럼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좋게 받아들여질 수도 나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부정적인 말을 할 때는 제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서 말해줬으면 싶었다.


세월이 벌써 이만큼 흘러 나는 이제 4년 차를 지나 어느덧 5년 차를 바라보고 있었. 그동안 팀명이 두어번 바뀌었고 무 환경이 변했고 일에 대한 태도 또한 달라졌다. 요즘엔 예전처럼 새로운 걸 내기보다 매일 정해진 일을 나사처럼 행할 때가 더 많았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잖아' 마음이 울컥할 때에도 '일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밖에 못하나' 머리가 지끈지끈거릴 때에도 그냥 덤덤하게 주어진 일을 하곤 했다. 맡은 일을 시간에 맞춰 끝내면 서로가 편했다. 받는 만큼 일하자 생각하는 걸 보면 그 사이 나 조차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품이라고 하니깐 부품에 맞춰서 행동할거야. 열정과 인간다움은 회사 밖에서 찾으면 된다. 어느새 존버 정신으로 똘똘 뭉친 염세주의자가 돼버린 것이었다. 다행인 건 직장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크로스핏이 정체된 내 삶에 활기를 더해준다는 것이다. 최근 2년 동안은 한번 잘해도 다섯 번 칭찬해주는 영혼의 닭고기 수프 같은 크로스핏이 있어서 다시 또 힘을 낼 수 있었다. 일터에서 아무리 부딪치고 깨져도 늘 등 뒤엔 크로스핏이 있었다. 미생보다 더 미생 같은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게 회사라는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꾸준히 다니는 이유는 크로스핏에 있지 않을까. 미생은 판타지잖아, 드라마야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매번 해피엔딩을 바랄 수 없는 게 회사 생활이지만 오늘도 회사에서 벌어들인 월급으로 크로스핏 박스에 등록할 수 있어서, 부정적이기보단 긍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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