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5년간의 벚꽃축제 생존기 (7-1)

2025년. 모두의 정원, 나의 마지막 벚꽃.

by 아이린

2025년 벚꽃축제의 주제는 '모두의 정원'이었다.

이 주제는 당시 순천시 국가정원을 필두로 지방자치단체들의 초유의 관심사가 '정원'이었던 영향도 있었지만, 사실 개인적인 생각이 짙게 반영되기도 했다. 여의도 벚꽃길이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2025년 축제 포스터. 2025년에는 정말 역대급 많은 협찬사가 함께 해주셨다. 감사합니다!


마음으로 보는 벚꽃

때는 2024년 초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벚꽃축제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출근길에 유퀴즈에 출연한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기자님은 '체헐리즘'이라는, 직접 체험을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획 기사로 유명했다.

나는 이미 예전에 그가 쓴 '그 많은 벚꽃은 누가 치웠을까'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벚꽃축제가 끝난 뒤 벚꽃을 치우는 청소 업무를 직접 체험하고 쓴 기사였는데, 그때 그 체험의 무대가 여의도 벚꽃길이어서 기억이 난다.

2022년 축제는 취소했지만 벚꽃길을 완전히 개방했을때 새벽에 취재하러 오셨었다.

'떨어진, 그 많은 '벚꽃잎'은 누가 다 치웠을까' 기사 > https://v.daum.net/v/EXAR4rIWVj


그런데 이번 유퀴즈 영상에서 언급된 기사는 내게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각장애인이 되어 직접 하루를 체험하는 기사 중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짚고 눈을 감은 채 집에서 우리 벚꽃축제 행사장까지 찾아오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판이나 점자블록이 전무한 우리 축제공간에서 느꼈던 공포와 불편함, 그리고 중간중간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유퀴즈에서 간략하게 말씀해주시는데,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아,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블록도, 음성 안내도 없는 벚꽃축제 행사장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겠구나.' 이 깨달음은 나에게 거대한 각성이었다.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 축제를 기획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 축제를 찾는지, 그들에게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관성적으로 준비해왔던 것이다.

'000만명 다녀감'과 '민원 없음'이 최고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소외될 수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남형도 기자님의 기사는 나에게 매우 큰 충격이자 동시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온 남형도 기자님과 벚꽃축제 방문기 (출처: tvN)
유퀴즈에서 언급되었던 기사와 여의도 벚꽃길에서 찍은 사진

'눈 감고 '벚꽃축제'에 갔다' 기사 >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041710371583618


나는 출근하자마자 관광 업무 담당자를 만나 이 기사와 영상을 보여주었다.

늘 외국인 관광객 대상 홍보와 내국인 방문 활성화에 집중하던 우리의 시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돌려보자고 설득했다.

홍보를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오는 우리 축제는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것' 도 중요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방문객이 꽃 축제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축제의 문턱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꽃 구경'이 주가 되는 우리의 축제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축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마음으로 보는 봄꽃축제' 시각장애인 축제 해설 프로그램 탄생의 시작이었다.

벚꽃축제는 평소 차량이 통행하는 길을 임시로 통제하고 개최되는 데다 행사장이 꽤 길고 넓어, 완벽한 시각장애인 안내 시스템(점자블록, 점자로 된 안내판, 음성안내 등)을 축제를 위해 단기간에 구축하는 데는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시스템이 완전히 구축되어 시각장애인 혼자서도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구조가 되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고민끝에 우리는 그 어려움을 섬세한 해설이 있는 그룹 투어 프로그램으로 녹여내는 방법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미 서울시내 일부 관광명소에서 시각장애인 대상 관광해설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서울관광재단에 요청해, 재단이 양성하는 관광해설사 분들 중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화 해설(영상해설)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을 섭외해 줄 것을 요청드렸다.

그리고 관광팀 담당자는 전문가와 함께 시각장애인용 축제 해설 스크립트를 따로 개발했다.


- 시각장애인 특화해설(영상해설)은 일반 관광해설과는 표현이 매우 다르다.

단순히 '여기 벚꽃나무가 있습니다' 가 아니라, '벚꽃나무가 어느정도로 높고 큰지, 나무의 촉감은 어떤지, 가지에 꽃이 몇 개가 피는지, 꽃잎은 몇장, 어떤 색이고 촉감이 어떤지'를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직접 키높이로 드리우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벚꽃을 만져볼 수 있게 안내한다.

참가자들은 나무와 벚꽃잎을 만져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는 등 해설과 함께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이용해 벚꽃나무를 느낀다. -


시각장애인이 벚꽃을 즐기는 방법 (사진: 조선비즈, 더팩트)


나는 쌈짓돈 처럼 아껴둔 예산 중 일부를 써서, 예전에 같이 협업했던 팀에게 국회의사당과 축제장 지도를 3D 프린터로 제작해 달라고 했다.

축제장 초입에서 그 촉지도(만질 수 있는 굴곡이 있는 입체 지도)와 의사당 모형을 직접 만지며 축제장의 위치와 바로 옆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대한 해설을 듣고, 벚꽃과 개나리 등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는 오감 체험을 추가했다. 벚꽃길 위에서 버스킹을 하는 음악가의 음악을 직접 듣고 악기를 손으로 만져보며 소리의 감동을 전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뜻에 공감하는 지역 관광사업체중 한 곳인 여의도 페어몬트 호텔측에서 도와주셔서 호텔 쉐프가 만들어주신 샌드위치 도시락 세트와 함께 한강에서의 피크닉도 준비했다. 인근의 서울 마리나에서는 30인용 요트에 탑승해 한강의 강바람을 느껴볼 수 있도록 협조해 주셨다.

여러 기업에서 도와주신 덕에 자칫 밋밋할 수 있는 해설프로그램이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느껴볼 수 있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구성으로 탄생했다.

(왼쪽) 3D프린터로 출력한 벚꽃축제장과 국회가 표현된 촉지도, (오른쪽) 3D프린터로 출력한 국회의사당
(왼쪽) 완성된 촉지도를 만져보는 모습, (오른쪽) 2024년 서울마리나의 도움으로 탑승했던 요트 (사진:데일리안)

2024년도에 시범운영을 위해 영등포구 관내에 등록된 시각장애인들을 초청해 진행되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참여해준 분들의 피드백을 받아 보완해서 2025년부터는 이 프로그램을 상설화하여 운영했다.

바로 전국의 모든 시각장애인들 대상으로 문을 열어두고 싶었지만, 벚꽃길이 있는 영등포구 내의 시각장애인 분들을 먼저 더 모시자는 의견으로, 아쉽게도 올해까지는 관내에 등록된 분들에 한정하여 신청을 받았다.

2025년에는 마리나 요트 대신 서울달(열기구)을 타는 것을 계획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 취소되었다.

많이 아쉬워 하셨지만 다음에 날 좋을때 따로 탑승하는 것으로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프로그램은 2025년도에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 약자 동행 사례와 매니페스토 최우수상에도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모든 의미를 담아 2025년의 주제를 '모두의 정원'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벚꽃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피어나듯, 축제 역시 모두를 포용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2026년에는 이 프로그램이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모두 방문할 수 있도록 더 확대되고 열리기를 기대한다.


모두의 참여로 피어난 정원

‘모두의 정원’이라는 주제에 맞게, 시민정원사들이 직접 만드는 팝업 가든도 운영했다. 총 10개 정원. 각자의 이야기와 식물을 담은 소규모 정원이었지만, 축제에 참여하는 방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행사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드는'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다.

2024년부터 시작된 팝업 가든은 점점 그 주제와 규모가 다양해졌고, 올해는 길 중앙에 배치해 벚꽃을 마주보고 쉬어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 더 인기가 좋았다.

벚꽃을 마주보고 자전거도로에 배치된 팝업가든들 (사진: 영등포문화재단

늘 단상에 올라 지루한 인사말씀을 늘어놓은 개막식도 2024년부터 폐지 시켰고, 대신 영등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담은 옷을 입고 나와 걷는 '꽃길 걷기' 퍼레이드로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2025년의 꽃길걷기에는 멀리서 달려와 준 영등포구 친선도시(경남 고성, 경북 울릉, 충남 청양)들의 캐릭터와 협찬사의 캐릭터(우리은행, 크리넥스, 유한킴벌리, 롯데홈쇼핑 벨리곰), 각양각색의 꽃 장식, 코스튬과 함께한 시민 300여명의 퍼레이드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축제의 경계가 무대와 무대 밖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로 옮겨간 느낌이었다.

'꽃길걷기' 축제 개막행사 (사진: 영등포문화재단)

어찌 보면 내 커리어의 마지막 벚꽃축제에 가장 적절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모두의 정원'은 단순히 축제의 슬로건을 넘어, 기획자로서 나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방향성을 다시 일깨워준 메시지였다.


결과적으로 2025년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이케아와 더 현대 등 많은 기업들에서 함께했고, 2024년의 악몽 같았던 먹거리나 바가지 물가 이슈도 없이, 역대급으로 가장 괜찮고, 예쁘고, 좋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끝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엔 정말 기가 막히게 개화와 낙화 시기도 잘 맞췄다! 지난 몇 년간 날씨와 싸웠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축제가 이처럼 다른 해보다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잘 흘러갔던것과 달리, 나에게 깊은 쓸쓸함과 분노를 안겨주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이 벚꽃축제를 끝으로 퇴사를 결심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2025년 벚꽃축제는 나의 커리어 마지막 벚꽃이 될 운명이었다.

내가 가장 애정했던 축제가 퇴사의 원동력이 되어준 셈이니,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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