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화려한 이름 뒤에 숨은 현실

문화기획자 같은 것들을 꿈꾸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

by 아이린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의 무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직업 중 하나가 아마 문화기획자일 것이다.

축제를 만든다고 하면 단순히 '이벤트 업체야?' 하고, 예술가들과 협업한다고 하면 '그럼 작가냐?'라고 묻는다. 도시 정책과 연계해 일한다고 하면 '공무원'처럼 보이고, 지역 주민들과 현장을 만들면 '사회운동가'로 오해받기도 한다.

문화기획자는 늘 세상 모든 분야들의 경계위에 서 있다.

예술가이자 행정가, 프로듀서와 커뮤니티 오거나이저, 심지어 생활예술인까지.

누군가는 공연장의 운영을 설계하고, 누군가는 축제를 기획하고, 또 누군가는 동네 마을잔치를 만들어낸다. 역할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사람과 자원을 엮어 새로운 경험을 빗어낸다는 점이다.

설명하려고 하면 모호해지고, 정의하려고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직업. 그것이 문화기획자다.


양성 과정의 홍수

이 모호한 직업을 '전문화'한다며 지자체와 기관들은 앞다투어 '문화기획자 양성과정'을 쏟아냈다.

몇 주짜리 워크숍부터 몇 달짜리 교육과정, 수료증과 수료혜택을 내세운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이 과정들의 표면적인 목표는 그럴듯 하다.

'기획의 기본기를 배우고, 현장에서 활동할 인재를 양성한다.'

하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기획서 작성법, 예산 편성, 사업 공모 신청 방법 등과 같은 행정 매뉴얼 교육을 기반으로 한다.

냉정히 말해, 이런 교육이 진짜 기획자의 자질을 길러줄까? 의문이다.

가끔 정말 기획자의 창의성과 주도성을 기르는 커리큘럼을 가진 양성과정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런 건 수료생이 문화재단과 같은 조직으로 취업을 하게 된다면 '기획자'라는 역할에 대한 괴리감을 크게 느끼게 만들 뿐이다.

일회성 교육의 범람이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더 값싸게 만들고, '수료증을 따면 기획자가 된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최근 십여 년간 국내 여러 대학은 앞다투어 '예술경영학과'를 신설했다. 예술과 경영의 교차점에서 전문 인력을 키운다는 명분이다.

안 그래도 타 전공과 비교해 취업률이 낮은 문화예술계에서 그나마 통계에 보탬이 되는 전공일지도 모른다.

커리큘럼에는 문화정책, 마케팅, 회계, 기획실습 등이 포함되어 있어 듣기엔 그럴싸하다.

그러나 졸업 후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화려한 간판을 보고 입학했지만, 졸업 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문화재단의 높은 취업 장벽과, 간신히 들어가도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기획보다는 행정과 민원에 치우친 업무가 부지기수다.

기관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직접 예술 경영'을 하는 프리랜서나 창업을 택하지만, 결국 정부 보조금 사업에 매달리게 된다.

독립은 했으되, 또 다른 종속이 시작된다.


기관 취업의 현실: 안정적이고 화려한 간판 뒤의 행정 노동

위의 양성과정을 통해 '문화기획자'나 그 비스무리한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음 단계는 정부 출자출연 기관인 문화재단 같은 공공기관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 이다.

이 기관들의 채용 공고에는 '지역문화예술 진흥', '시민 문화향수 제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재', '혁신적 마인드'라는 문구가 반짝인다.

지원자들은 그 문구에 마음이 흔들린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을 기다리는 듯 착각한다.

그러나 그 빛을 통과해 들어간 순간, 기다리고 있는 건 창의적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형광등 불빛 아래 쌓인 문서 더미다.

수십대 일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첫 날, 당신에게 주어진 일은 사업 기획이 아니라 지출결의서 양식대로 결의서를 작성하고, 결재선을 익히는 것이었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꿈은 첫 주 주간 회의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왜 000사업을 왜 하는지, 이 사업을 통해 기관이 실현하고자 하는 비전과 가치따위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신 팀장은 말한다. "(주)△△△ 업체와 계약해. 대표님이 잘 아는 사이래"

결국 당신이 하는 일은 업체가 작성한 실행계획안을 받아 조직 양식으로 고쳐 '추진계획안' 이름으로 결재 올리는 것이다.

어느 날은 민원 대응으로 하루가 가고. 어느 날은 오늘 퇴근 전까지 작성해 달라는 의회 제출 문서 작성에 하루를 다 날린다. 또 어느 날은 시의원 방문 때문에 행사 순서를 모조리 갈아엎는다. 심지어 '시민 참여 확대'라는 명분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주민 항의로 취소'되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아이돌 오디션 마냥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건만, 이런 현실을 예상하고 입사한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그 경쟁마저 공정하지 않았다는 뉴스는 주기적으로 터진다.

시험 문제 유출, 낙하산 채용, 비위 직원 재 채용…

'아, 내가 떨어진 게 실력 때문이 아니었구나'라는 씁쓸한 깨달음은 지원자들의 멘탈을 세 번은 더 갈아 넣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원자가 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현실: 독립의 또 다른 이름, 보조금 노동자

기관의 문턱을 넘지 못했거나, 스스로 공공의 틀을 거부한 이들은 프리랜서 혹은 창업의 길을 택한다.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명함에 '00스튜디오 대표'라고 적고, 어디 가서 '독립 문화기획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큼은 왠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곧장 냉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올해 공모 준비는 했어?'

전국적으로 수백건의 공모사업이 연초에 일제히 열리고, 그 성적표에 따라 한 해의 수입이 결정된다.

공모에 떨어지면, 그 해의 안정적인 먹거리는 날아간 셈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창의적 기획안'을 쓰는 게 아니라 사실상 공모 기관과 심사위원의 '취향 맞추기 능력고사'에 응시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적 비전보다는, 표를 맞게 채웠는지, 첨부 파일이 10MB 용량을 초과하지 않고 잘 올라갔는지가 합격을 좌우한다.

운 좋게 선정되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정산의 늪이 기다리고 있다. 영수증은 정산시즌이 되면 사라지고, 증빙서류는 왜 꼭 규정과 어긋나며, 사업비 환수는 왜 그렇게 무섭게 다가오는지.

"나는 창의적인 독립 기획자"라며 프라이드를 세웠던 어제의 나는, 오늘 "내역이 모두 표시된 영수증과 비교견적서를 꼭 달라"고 거래처에게 읍소하고 있다.

결국 프리랜서 문화기획자의 삶은 '독립'과 '자유'라는 단어보다는, '서류'와 '정산'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다.

스스로를 기획자라 부르지만, 사실상 보조금이라는 밥줄에 매달린 비정규 행정노동자다.


거지같은 현실에서도 가질 수 있는 희망

솔직히 말하자. 문화기획자의 현실은 거지같다.

조직 내에서 나의 관심사와 욕구는 뒷전이고, 적은 임금을 받으며 택도 없는 예산으로 사명감만으로 일을 해야 한다.

홀로서기를 선택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모 좀비', '정산 노동자'라는 자조적 별명을 달고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길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모든 '거지같음'을 덮어버릴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축제 현장에서 한껏 뛰놀며 웃는 얼굴, 전시장 앞에서 "이건 뭔가 다르다"라며 발걸음을 멈추는 관객, "이런 건 처음 해본다"며 들뜬 어르신의 목소리.

그 작은 순간들이 현실에 지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희망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다.

희망은 작은 사건 속, 일상의 틈새에서 피어난다. 기획자는 그 틈을 발견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한글'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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