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우리는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실패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실패는 우리에게 단발적으로 다가왔다가 쉽게 잊혀지지만, 때론 오래도록 고통받는 지독한 실패도 있다. 이런 지독한 실패의 끝에 오는 건 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다. 그때부터 새로운 마음가짐과 색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 삶을 다시 평가하고 재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빨랐다고 해야 할까, 늦었다고 해야 할까. 나의 첫 지독한 실패는 스무 살의 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2005년에 두 번째 수능을 치르기 전까지는 내가 똑똑한 줄 알았다. 첫 번째 낙방은 불운이었거나 실수였겠거니 위안하면서 비교적 씩씩하게 재수생활을 했다. 내로라하는 재수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수험생활을 했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사실은 똑똑한 게 아니라 그냥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낙방을 시작으로 대학생활 내내 지독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 실패의 끝에 찾아온 깨우침은 내가 공부를 성실히 한다고 해서 똑똑해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슬픈 사실이었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딛고 있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었다.
똑똑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과 똑똑해질 수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내 20대를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이질적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4월의 첫 중간고사였다. 공대의 시험은 너무 어려워서 보통 평균점수가 40점 언저리에서 형성되었는데, 매 시험에서 나는 정말 죽기 살기로 밤새서 공부해야 겨우 평균 근처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시간을 많이 들여서라도 전부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겐 그토록 어려웠던 그 시험에서 꼭 몇몇의 친구들은 90점, 95점을 받는 게 아닌가! 매번 반복되던 이 극복 불가능한 차이는 이후 아홉 학기의 대학생활 동안 끊임없이 내게 '나의 똑똑해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연히 친구들은 A 학점, 나는 B 학점. 성적표에 찍히는 학점 A와 B는 딱 1점 차이지만 실제 실력은 서너 배 차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영영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란 걸 첫 시험부터 깨달았다.
사실 이 지독한 실패는 두 번의 수능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지난 일 년의 시간과 노력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첫 번째와 꼭 같은 등급의 처참한 수학 성적표를 받아 들었을 때 이미 사단은 벌어지고 있었다. 수능 배치표의 어색한 급간을 노란색 형광펜으로 칠해 두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대충 지원서를 썼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정석대로 하나는 소신, 다른 하나는 턱걸이, 그리고 마지막은 안전빵. 우스운 얘기지만 그마저도 모두 떨어졌다가, 입학식 직전에야 소위 말하는 문 닫고 추가 입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미 삼수를 마음먹으면서 이번엔 성공할 거라고 이를 앙다물었건만, 추가합격 전화를 받고 좋아서 펄쩍 뛰는 엄마에게 안 가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엉거주춤 시작된 대학생활이 평탄할리 없었다. 모든 일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 나는 너네보다 한 살 더 많아 라는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업까지. 지옥 같은 대학생활의 시작이었다.
모든 게 어그러졌다. 대학만 가면 장밋빛 미래가 있을 거란 희망. 그 희망 때문에 희생되었던 내 학창 시절. ‘남자셋 여자셋’ 같을 것만 같았던 대학생활의 재미. 더욱더 마음이 아팠던 것은 이렇게 그냥 흘러가면 똑똑해질 수 없는 나의 미래는 분명 내가 어렴풋이 꿈꿔왔던 그것과는 다를 것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누군가는 나를 말렸어야 했다”
내가 이과를 간다고 했을 때, 학점에 맞춰 전기전자를 전공한다고 했을 때 , 그때 누군가는 나를 말렸어야 했다고 대학생활 내내 분개했다. 나는 '성공시대'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했었고, 책장에 있는 '아이아코카*'를 읽고 동경했으며 드라마 속 수많은 '기획실장님'들을 부러워했는데 누구도 내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히 물어주지 못했다. 내 가까운 주위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많았다면 달랐을까. 학교 선생님이 ‘남자가 공부 좀 하면 이과지’라고 단정하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나의 철없었던 대학생활은 이런 지리한 후회와 패배의식의 연속이었다.
*80년대 초, 폐업 직전의 크라이슬러를 부활시킨 전설적인 기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