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를 통해 끄집어낸 생각들
까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죄를 지은 대가로 신으로부터 형벌을 받는다. 거대한 돌덩어리를 산봉우리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형벌이 마무리되는 것인데, 문제는 돌덩어리가 꼭대기에 가져다 놓자마자 다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지프는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돌덩어리를 꼭대기로 밀어 올리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다. 결국 형벌은 끝없이 이어지는 셈이다.
연말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자체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다. 연말이 지나면 새해가 시작된다. 그 새해도 시간이 흘러 연말을 맞이하며, 또다시 새해가 찾아온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 즉 삶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반복의 연속이다. 시지프가 받는 형벌과 형식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삶을 일종의 형벌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흔히 '죽지 못해 산다'라고들 하는데, 단순히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 삶이라는 형벌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을 겪어 삶을 비관하고 세상을 등지는 경우가 많긴 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재력과 명예, 근사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목숨을 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자세한 속사정으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고욕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목표의 연속이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살아있는 한 끝없이 반복된다. 목표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목표 달성을 위해 살아가는 '내 던져진' 존재다. 이 삶의 부조리를 목격하고 저항하려는 사람들이 최후에 택하는 것이 자살이라고 일부 실존주의자는 말한다. 죽어야만 비로소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들이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를 모른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다. 각자는 저마다 주어진 삶이 있고,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릴케는 자살하는 사람을 가리켜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겁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무한의 형벌에 괴로워하던 시지프스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돌덩어리를 밀어 올리고, 또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바라보며 시지프는 삶의 정체를 목격한다.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행한 삶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불행을 겪고 있다는 것.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이 없다고 해서, 그 삶의 가치가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생각에 앞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사실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개인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자각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생기면, 저절로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