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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문

선동

by 정재혁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로 알려진 ‘서동요’는 한국 최초의 선동가(歌)라고도 칭할 만하다. 서동(백제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렸다.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성 안의 아이들에게 부르도록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화공주는 백제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지만, 막상 그런 괴소문을 접한 선화공주의 심정은 오죽 답답했을까. 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공주를 귀양 보내기까지 했으니, 선화공주의 입장에선 서동을 따라가는 것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화공주가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언뜻 보기에는 서동이 가해자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실제로 가해자는 서동만이 아니다. 노래를 부른 아이들 또한 가해자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아무런 검증 없이 퍼뜨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시대가 변한 지금에 와서도 여전하다. 노래에서 SNS라는 새로운 매체로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흔히 온라인 ‘마녀사냥’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 피해자는 한 명 혹은 소수지만 가해자는 불특정 다수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사실 확인 없이 무작정 퍼다 날랐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문화지체현상(culture lag)’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물질문화의 변화 속도를 비물질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래에서 SNS라는 매체의 발전 속도에 비해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멋모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신라의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최근에는 인터넷 실명제나 악성루머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대책은 피해를 줄이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이 개선돼야 하며, 이를 위해 SNS 이용을 비롯한 인터넷 문화 전반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


선화공주의 경우와 같은 해피엔딩을 현실에선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일상생활에 타격을 입는 일반인들의 사례는 약과다. 몇몇 연예인들은 악성루머로 인해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분명한데 가해자는 불분명하다. 이것이 현대판 ‘밀실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재미있다는 이유로 근거 없는 내용의 글들을 퍼뜨리기에 앞서, 나 또한 이러한 ‘밀실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칼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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