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윤택해졌지만, 잃어버린 것도 없지 않다. 바로 예전 기차들에 대한 추억이다. KTX시대 이전에는 기차 종류가 총 네 가지였다. 비둘기, 통일, 무궁화, 새마을. 비둘기와 통일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무궁화와 새마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기존의 것을 새로운 것이 대체하는 현상은 흔히 일어난다. 기차 외에도, 이동통신 수단인 '삐삐'는 휴대폰으로 대체됐고, 휴대폰은 그 안에서 다시 스마트폰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다소 복합적이다. 문명의 이기로부터 편리함과 안락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 강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비둘기호와 통일호에 대한 감정도 이와 유사하다.
비둘기와 통일은 단순히 기차 이름으로써의 의미 그 이상이다. 비둘기는 보통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통일은 동요의 제목처럼 '우리의 소원'이다. 그런데 현재 한반도의 상황은 비둘기와 통일이 없는 기차의 모습과 흡사하다. 북한의 계속된 무력도발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고 있고, 이에 대항해 우리나라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기차는 사라져도 되지만, 평화와 통일의 의미는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상황만 봐서는 매우 비관적인 것이 사실이다.
과거 기차 이름에 비둘기나 통일과 같은 단어를 썼던 이유는, 기차가 단순히 교통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는 통일을 염원하는 표어임과 동시에 기차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경의선이 운행되기도 했고,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기차는 한반도를 넘어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권 초기 높았던 가능성은 이제 0에 가까워졌다. 기차는 이제 우리에게 대중교통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됐다.
한 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지금 남아있는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명칭을 비둘기와 통일로 바꾸면 어떠할까.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금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비둘기호와 통일호를 불러내는 이유는,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