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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문

가면과 복면...

by 정재혁

복면과 가면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둘 다 실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가린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복면이 단지 가리는 것에 그치는 반면, 가면은 가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가면의 다양한 모양과 생김새는 사용하는 사람이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탈춤극에 쓰이는 가면은 그 생김새가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인물들 간 구별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한다. 복면에 비해 가면이 좀 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셈이다.


우리 사회를 일종의 거대한 역할극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종류의 가면 혹은 복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결코 하나의 역할만 수행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면을 쓰고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나는 시간이 흘러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학생이었던 시절도 있고, 직장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정치적 신념에 따라서는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된다. 이렇게 가면을 쓴 개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사회는 나 혼자만 사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 가면이 아니라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몰개성화되며, 단지 개체 수로만 구분이 가능할 뿐이다. 결국 이 사회, 크게는 이 세상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엑스트라가 된다. 이는 인간 삶이 처한 불가피한 현실이며 또한 해결하기 어려운 실존적 난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러한 실존적 난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내 소수의 주인공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만드는 현실에 있다. 흔히 '대중'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사회를 주도하는 권력자들은 각각의 사람들을 커다란 무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성원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정치인들에게 국민들은 선거에 필요한 '1표'이고, 기업들에게 개인은 '소비자' 무리의 일원에 불과하다. 소수의 주인공들에 의해 사람들의 머리에 가면이 아닌 복면이 씌여진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자신의 삶에서는 주인공일 수 있지만, 결코 사회의 주인공은 될 수 없다. 사회 전체로 봤을 때는 언제나 복면을 쓴 채로 분주히 뛰어다니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엑스트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에게 씌워진 복면을 스스로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복면을 혼자 벗기가 어렵다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벗겨주면 된다. 몇몇 소수 주인공들에 의해 타자화 된 개인들은 서로 협력함으로써 그들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엑스트라인 사회는 실존적으로는 힙겹지만, 그래도 좋은 사회다. 그러나 소수만 가면을 쓰고, 나머지는 복면을 쓰고 있는 사회는 나쁘다. 우리는 지금 가면극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복면극에 참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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