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지만, 둘의 속성은 매우 다르다. 요즘 우리네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아마도 '쿨함'이라는 말일 테다. 만남과 이별을 묘사할 때, 우리는 '쿨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만남과 이별을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쿨한 만남과 쿨한 이별. 앞서 만남과 이별의 속성이 매우 다르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쿨함'이라는 표현이 만남과 이별에 동등히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만남은 쿨할 수 있지만, 이별은 쿨할 수 없고, 또 그러해서도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만남은 기본적으로 우연적이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지내는 사람들, 혹은 공간들은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모두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은 충분히 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남은 우연적이기 때문에, 임의로 조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별은 조금 다르다. 이별은 우연적이지 않다. 이별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벌어지는 상황이다. 서로 만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이별을 하게 되는 상황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이다. 이별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쿨한' 이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이별의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한다. 이별에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쿨한' 이별이 아니다. 만남이 쉬웠듯, 이별도 마찬가지로 쉬워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만남은 쉬워도, 이별은 어려워야 한다. 만남은 우연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제어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별은 아니다. 이별은 인간이 의도하는 것이니까. 어려운 이별은 쉽게 말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이별을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먼저 이별을 결정한 사람은 상대방이 입장을 정할 시간을 줘야 함과 동시에 본인의 진심을 전해야 한다. 왜 이별을 선택해야만 했는지, 왜 그 시기가 지금인지 등등. '쿨한' 이별에는 이러한 배려가 빠져있다.
이별에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이별이 그것으로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했다. 이별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무 아픈 이별을 경험한 이는 새로운 만남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 아픈 이별을 경험하게 될까 봐, 만남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이별을 고하는 입장이 되는 반면, 다른 때는 내가 이별을 통보받는 입장에 처해지기도 한다. '쿨한' 이별은 이별에 있어서 주도적인 입장, 즉 이별을 먼저 꺼내는 사람에게만 유리하다. 하나 사람의 인생이 언제나 주도적인 입장에만 서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쿨하게 이별을 선언했던 이가, 과연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준비가 돼 있을 것인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나이 서른이 되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니, 예전 이십 대 때 들었던 것과는 다른 부분에 관심이 갔다. 나는 매일 만남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만남이 먼저고 그다음에 이별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만나는 것에만 신경을 쏟다 보니 이별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살아왔던 공간들도 그렇고, 또 어제의 나도 그렇고. 나는 그들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배려심을 보여줬던 적이 있었던가. 너무 쉽게, 너무 쿨하게 이별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어려운 이별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꽤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