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답사기
수학여행이면 경주였다. 지금은 세월호 이후 학생 단체여행이 중지됐지만, 예전 중, 고등학생이면 언제나 다녀오는 여행이었다. 수학여행을 갈 장소가 그렇게 없었는지 항상 경주에만 갔다. 문화 답사 명분으로 간 건 이해를 하지만, 문화재가 경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나라 역사는 신라만 있는 양 중, 고등학생 내내 경주만 갔다.
지금껏 수학여행 = 경주 공식처럼 따라다녔다. 이번 여행에서 다시 경주를 찾은 것은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경주에 가본 적이 없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와이프도 경주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 당연히 수학여행 = 경주인데 가본 적이 없다니, 중,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빠진 건가 의문이 들었다. 제주도로 갔다고 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주도라니.. 돈 많은 학교인가? 제주도는 딴 나라 외국 같은 곳이었다. 그런 곳을 수학여행으로 갔다고 하니, 잠깐 학교가 원망스러웠다.
수학여행 때 말고 처음으로 오는 불국사로 향했다. 학생 때 기억은 거의 없지만, 밑바닥의 기억들이 빼꼼 빼꼼 고개를 들었다.
낮은 나무가 무성한 넓은 정원 지나 매표소에 들어섰다. 생각 외로 가격이 무거웠다. 입구를 지나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을 보니 옛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리를 무섭게 지키고 있었다.
불국사의 대표 건물인 자하문을 보니 수학여행 때 단체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올라왔다. 그때 기억의 대부분은 자하문만 기억에 남아있다. 안쪽의 석가탑과 10원짜리 다보탑, 대웅전 등은 기억에 없다.
오랜만에 탑다운 탑을 보니 경외스럽고, 신비로운 건 1도 없고, 그냥 돌댕이로 보였다. 탑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그냥 돌 쌓아 올린 장식에 불과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대웅전 뒤쪽으로 들어갈수록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학생 때 본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처음 본 풍경이었다. 뒤쪽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 절은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건축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여행 오기 전, 유현준 건축가가 쓴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었다. 서양과 동양의 건축 양식과 문화 양식의 차이를 알기 쉽게 쓴 책이다. 여행 전 바로 읽은 책이라 그런지 건물들이 다르게 보였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불국사 바로 위로 석굴암이 있을 줄 알았지만, 1시간이나 등산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학생 때는 바로 간걸로 기억하는데, 기억의 오류였다. 찌는 듯한 더위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도로가 있어 차량으로 15분 만에 올라갔다.
석굴암에 입장료는 불국사와 같았다. 불국사와 석굴암 세트로 입장권이 없다 것에 의아해하며 석굴암 길로 접어들었다.
석굴암까지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 먼지 몰랐다. 학생 때 기억을 찾았지만 석굴암만 기억하고 가는 길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길 옆으로 절벽에 가까운 경사가 이어졌다. 길은 넓었지만, 안전 펜스도 없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 안쪽으로만 걸었다.
석굴암에 도착하니 예전 기억과는 반대로 작은 규모였다. 아마도 천마총 고분에 들어가는 입구와 석굴암과의 기억이 혼합된 듯했다. 지금은 석굴암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유리벽으로 막아놔서 돔형의 천정을 보지는 못했다.
한국의 등허리를 따라 먼길을 가야 했다. 경주에서 강릉까지는 4시간 남짓 걸렸다.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탔기 때문에 고속도로 같은 휴게소를 찾기 힘들었다. 출출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편의점에 잠깐 들러 근처 음식점을 검색했다. 포항에 손짜장 요릿집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아침을 호텔 조식으로 나온 빵과 시리얼, 과일만 먹었기에 밥을 먹고 싶었지만, 가장 가까운 손짜장집을 찾아갔다. 아무 생각 없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들어왔던 곳이 완전 맛집이 되었다. 허기짐이 심하면 뭘 먹어도 맛있지만, 수도권에는 보기 힘든 손짜장이었다. 면발이 떡같이 쫄깃하고 손으로 직접 팡팡 뽑았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은 굵기가 더 맛있어 보였다. 와이프와 아이들은 먹으면서 연신 우와우와를 연발했다. (허겁지겁 먹기 바빠서 사진을 못 찍은 게 못내 아쉽다.)
가는 길 중간쯤 울진에서 잠시 쉴 겸 카페로 들어갔다. 백사장 바로 옆에 있는 카페였다. 특이하게 주문을 2층에서 하고 1층으로 가져내려와야 했다.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가지고 난 후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바닷물이 옥색이었다. 올해 1월에 간 제주도에서도 보지 못한 색상이었다. (그때 제주는 여행 내내 흐려서 바다색이 탁한 회색 빛이었다.) 어제 부산 자갈마당의 바다는 흙탕물이었지만, 동해는 깨끗하고 말끔한 옥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져 있었다.
강릉에 거의 진입하기 전 옥천 휴게소에 한번 더 들렀다. 바다를 180도로 볼 수 있는 휴게소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온 사방이 바다로 가득 찬다. 마치 사이판의 만세절벽에 있는 느낌이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경주를 출발했는데 어느덧 늬엇늬엇 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