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코로나 이후와 작년 큰 아이가 고3이라 여행을 거의 가지 못했다. 사실 딱히 여행을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코로나가 풀렸다고 해서 3여 년의 집틀막 습관이 쉬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행의 피곤함이 먼저 다가와 이미 갔다 왔다는 착각마저 들곤 한다. 집과 회사가 전부였던 3여 년의 시간 동안 정신과 육체는 이미 매너리즘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입시가 끝나고 다행히 합격이라는 고생의 대가를 받고 나니, 견문을 넓힐 겸 어디든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도 여전히 매너리즘이라는 놈은 ‘여행은 고생이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 그동안 여행은 대부분 내가 스케줄과 예약을 하고 새끼 오리가 줄줄이 어미를 따라가 듯 가족들이 따라왔다. 이번에는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여행의 모든 권한을 줬다. 나는 그저 자금만 대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완전 자유상태에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공모전에서 자유주제가 어려운 이유도 주제가 한정되지 않기에, 무엇을 주제로 잡고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완전 자유에서는 창의력은 고사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 쉽다. 코딩 관련 교육을 할 때도 ‘그냥 만들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만들어 봐라’라고 요청하면 오히려 학습에 대한 퀄리티가 저조하다. 반대로 예시 사이트를 제시하고 ‘이것과 똑같은 주제와 구성을 다르게 표현하고, 만들어라’라고 요청하면 어느 정도 학습 퀄리티가 보장이 된다.
여행의 권한을 다 줬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여행을 짜라고 하면 헤매다 시간만 흐르고 결국 못 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여행 지역은 2군데로 한정하고 여행 일자도 한정했다. ‘일본’, ‘대만’ 두 군데 중 한 군데와 2월 설날 이후 다음 주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박 4일로 한정했다.
처음 일본으로 여행을 설정했다.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날부터 일본 관련 뉴스가 터지기 시작했다. 지진과 더불어 원전 유출, 방사능 오염수 방류, 한국 여행객 바가지 등 안 좋은 소식만 터졌다. 일본에서 대만으로 여행 계획을 선회한 후, 대만 선거가 이슈가 됐다. 중국에서 선거를 예의주시 하고 있으며, 대만 해협의 긴장도가 고조됐다. 일본도 그렇고 대만도 그렇고 차라리 ‘제주도’에 다시 가는 게 어떠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일본이나 대만이나 예전부터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이슈다. 일본은 후쿠오카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에 대해서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1년 전부터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하겠다고 발표하고, 현재 방류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에 대해 동해안 지역의 어류에 대해 민감한 상태이다. 지진은 거의 1년에 몇 차례나 발생하는 곳이 일본이다.
대만은 중국에서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흡수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이에 미국이 견제하고 있는 상태다. 대만 해협은 매년 우리나라의 남북과 비슷한 상태로 긴장이 유지되고 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는 시점에서 좋은 것만 보면 좋겠지만, 처음 보는 것은 대부분 안 좋은 것만 보게 된다. - 환상보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시작할 때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이 더 크기에 생각만으로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시스템을 개발할 때는 전체 서비스와 전체 시스템을 항상 상기하고 개발해야 한다. 어떤 서비스인지도 모르고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많은 개발자들이 어떤 서비스인지는 알지만, 전체 시스템을 모르고 자신에게 할당된 것만 진행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좀 더 효율적인 개발을 할 수 있지만, 시키는 것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 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전체를 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
이번 일본과 대만 여행이라는 관심이 생겼기에 그 나라에 대한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세계정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두려움은 없이,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겠지만,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다 보니 선택이 늦어졌다. 여행 기간 1달여를 남겨두고, 대만을 가기로 결정했다.
대만에 가고 싶은 여행지를 와이프와 아이들이 같이 찾았다. 여행지까지 결정하고 나서 며칠을 아무런 액션이 없었다. 보다 못해 항공예약은 언제 할 거고, 숙박은 정했는지를 물어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항공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금액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하니, 정해진 금액이 아니냐는 문의가 되돌아왔다. 수요가 많아지면 당연히 금액은 올라가기 마련이다. 항공편과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여행 수요가 많아지면 금액 또한 올라간다. 부랴부랴 항공편을 알아보고 금액을 산정해 보았다. 1주일가량을 가격이 떨어질까 주시하다, 더 올라갈 것 같아 항공편 예매를 하기로 했다. - 모든 예약은 내가 있어야지만 예약할 수 있다고.. 내가 없을 때는 능동적으로 알아보지 않는 듯했다. -
항공권 예매는 대부분 스카이스캐너로 검색했다. 예전보다 처음 보는 예약 사이트가 많이 보였고, 대부분 외국 여행사였다. 외국 여행사에서도 예매가 되는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워낙 신종 사기가 많다 보니, 외국 여행사는 일단 패스했다. 한국 여행사를 찾아보니 가격이 외국 여행사보다 비싼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슈가 발생하면 언어가 소통되는 곳이 나을 것 같아, 한국 여행사로 알아보기로 했지만... 결국 더 싼 곳으로 눈길이 갔다.
그래도 그나마 많이 들어본 익스피디아 통해 진행하기로 했다. 익스피디아는 항공권을 예매할 때 여권번호를 받지 않는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여타 사이트에서 필수로 여권번호를 받고, 이미 여권번호는 필수로 기입해야 항공권이 예매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익스피디아에서는 여권번호를 받지 않았다.
익숙함이 흔들리는 순간 ‘심박하다’가 아닌 의심 먼저 하게 된다. 익숙함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여권번호 없이 예매가 가능하지?’ 피싱 사이트가 아닌지 도메인을 확인했다. 실제 익스피디아 회사에서 사용하는 정식 도메인인지도 검색했다. 정식 사이트가 맞는 것까지 확인하고, 구글링을 통해 ‘익스피디아 항공권 예매 여권번호 없음’으로 검색하여 블로그 등을 찾아봤다. 역시나 다른 블로그들도 나와 같은 불안함을 느끼고, 항공사 사이트에서까지 예약이 됐는지 확인하고, 그래도 불안해서 항공사 사이트를 통해 여권번호를 기재해야 한다는 블로그도 있었다. - 결과적으로 익스피디아는 여권번호가 없이 이름만 가지고도 예약이 가능하다. 다만 공항에서 빠른 수속을 위해서는 여권번호가 있으면 좋다는 의견이 많다.-
불안함을 떨쳐버리기에는 힘들다. 익스피디아의 획기적? 인 시도의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대만 항공사인 타이거 항공사 사이트에서 직접 예매를 하기로 했다. 첫 예매 시작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좌석지정까지 완료하고 결제를 하는데, 어디에서 오류인지는 몰라도 결제 이후의 결제 결과 페이지로 이동하지 않았다.
대기 페이지에서 리로딩(페이지 새로고침)을 하게 되면 결제 결과를 기다리는 통신이 끊기기 때문에 결과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 몇 분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브라우저의 개발자모드를 열어서 콘솔을 확인했다. 빨간색의 오류가 여기저기 발견됐지만, 큰 문제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통신 도중 회선이 끊긴 듯했다. 카드결제가 됐는지 결제 카드사 앱을 열어 결제 내역을 확인했지만, 결제는 되지 않은 상태였다. 첫 예약이 실패로 끝난 시간이 저녁 12시를 넘어가고 있어 다음날 다시 하기로 했다.
다음날 저녁 2차 예매 시도는 성공했다. 예매 메일이 날아오고, 결제 됐다는 메시지도 날아왔다. 모두가 성공의 맛을 봤다. 다음은 숙소다. 항공권 하나 예매하는데 모두가 진이 빠졌다. 숙소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이제 여행까지 남은지 3주 정도다.
숙소는 여행지에서 멀면 힘들어진다. 여행지가 다양하다면 여행지마다 숙소를 옮겨야 한다. 여행지는 정해졌다고 하니,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정하라고 했다. 처음 가는 곳이니 되도록 호텔은 4성급 이상으로 알아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큰아이가 숙소를 검색했다. - 내가 여행 계획할 때 숙소는 조식포함 3성급 이상의 정원이 있는 호텔을 알아본다. 달랑 건물만 있는 빌딩형 호텔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호텔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여행 비용의 1/3에 해당하는 비용을 투자한다. -
몇 군데의 숙소를 공유받고 보니 대부분 빌딩형이었다. 와이프한테 빌딩형 숙소인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 와이프는 여행을 휴양의 개념으로 생각하기에, 전망이 좋은 호텔에서 편하게 있는 것을 선호한다. - 상관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거기가 괜찮으면 예약 진행하라고 했다. 큰아이가 가격을 보고 조식불포함으로 진행하자고 했다. 조식은 포함돼야 하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와이프도 어차피 늦게 일어나고, 대만은 아침 식사로 유명한 맛집도 있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 나는 여행의 하루 시작은 호텔 조식이라는 생각이 있다.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시작하면 여행을 시작한다는 의식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 아고다에서 숙소를 예약하고 결제까지 완료됐지만, 숙박날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취소하고 조식불포함으로 예약을 다시 진행했다.
항공권, 숙박까지 여행의 기본적인 것은 끝났다. 이제 여행지까지의 동선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교통수단과 일정에 맞춰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정하는 것만 남았다. 동선을 생각해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지, 택시로 가야 하는지, 기차를 타야 하는지 알아보라고 요청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집에 있자라고 말이 나온다. 항공, 숙박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던 여행계획이 이제부터 본격 시작이라고 하니 다들 손사래를 쳤다. 이제 여행까지 2주가 남았다.
여행지는 크게 단수이 지역, 지후펀 지역, 스펀 지역이다. 단수이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요 촬영지이고, 지후펀은 영화 <센과 치히로>의 배경이 된 지역이다. - 지브리에서는 해당 지역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딜 봐도 비슷하다. - 스펀은 천등(풍등)과 철길 거리로 유명한 곳이다. 동선을 검색하다 보니 여행 기간 중 토요일이 핑시 천등 축제 (원소절(정월대보름)을 기념으로 열리는 축제)와 우연히 겹쳤다. 핑시는 루이팡역에서 핑시라인에 있는 스펀 다음역이다. 어쩌다 여행 목적이 영화 촬영지와 축제가 됐다.
숙소는 타이베이시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서울로 보자면 타이베이역이 서울역이고, 숙소는 대략 상암역 쪽에 있는 것과 같은 위치다. 단수이는 포천 정도에 위치해 있고, 지후펀은 속초, 스펀은 삼척에 있는 정도다.
대만에는 모든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이지카드라는 것을 판매한다. 충전식으로 우리나라 T머니와 비슷하지만, 대중교통뿐만 아니라 편의점이나 지원하는 상점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르다.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이지카드에 대해서 알려주고, 활용해서 동선을 알아보라고 했다.
패키지가 아니기에 관광버스 도 없고 대중교통이나 택시에 의존해서 이동해야 한다. 와이프와 아이들이 동선을 같이 고민하다 와이프가 그냥 렌트로 해서 운전하면 안 되냐는 볼멘소리를 했다. 잠깐 렌트도 알아봤지만, 오토바이가 많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글들이 많고, 주유관련해서도 우리나라와 다르고, 대부분 중국어이기에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했다. 며칠간 동선과 중식, 석식을 해결할 식당을 찾다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설을 쇠고 4일만 남아 있었다.
항공 예약을 다시 확인하니 저녁 00시에 출발해서 대만에는 새벽 2시 30분(현지 시간 1시 30분)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숙소는 도착 당일 오후 4시 이후에 체크인이었다. 도착해서 잘 곳이 없는 상태다. 부랴부랴 도착해서 하루 숙박할 수는 있는 싼 가격의 공항 근처 호텔이나 모텔을 검색하라고 큰아이에게 말했다. 모두들 도착 후 일정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공항 픽업이 가능한 호텔로 알아보는데, 픽업이 가능한 호텔이 없었다. - 동남아나 태국에는 호텔 픽업 서비스가 웬만하면 있지만, 대만은 찾기 힘들다. - 큰아이가 싼 호텔을 찾다 공유해 준 곳이 거의 단수이 지역(메인 숙소보다 더 멀다)이나 타이베이시였다. 공항 근처 5~10km로 한정하고 다시 찾았다. 그렇게 많이 싸지는 않지만, 입국, 출국 시에 많이 지내는 호텔이 있어 그곳으로 예약을 했다. 걸어서 가도 되는 곳이지만, 새벽의 넓은 주차장과 가로등에 의지해서 가야 하기에는 조금 위험스러워 보였다.
결국 동선과 맛집은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여행지, 항공, 숙박, 일별 주요 일정만 결정된 채 출국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