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트’라는 단어의 가치

by 열혈정신과

요 몇 년 사이 나르시스트라는 단어가 SNS, 유튜브에서 굉장히 많이 보인다. 부모나 배우자가 나르시스트라고 하기고 하고 스스로를 생존자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SNS에서 유행하는 나르시스트라는 단어에는 어떤 진단적 가치가 있을까? 이 말은 어디에서, 누구의 어떤 주장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선, 정신과 의사의 진단 기준서인 DSM-5에는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NPD)라는 공식 진단명이 존재하지만,

일상적으로 ‘나르시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DSM-5의 엄격한 NPD 진단 기준을 완전히 충족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나르시스트’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Otto Kernberg는 경계성 성격조직(Borderline Personality Organization, BPO)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이 수준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self)와 대상(object) 표상 간의 통합이 실패하여 경계가 불안정하다고 설명했다.


자기와 대상의 경계가 불안정하면, 자신의 내적 상태(감정, 충동)를 타인에게 투사하거나, 반대로 타인의 감정을 자신 안에 끌어들여 혼동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타인은 독립된 존재라기보다는 자기 내부의 연장처럼 취급되고, 타인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반응할 경우 심한 분노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특성들이, 오늘날 ‘나르시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목격되는 모습과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대처 방법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자기-대상 경계가 흐릿한 사람에게는, 관계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과도한 융합을 피하는 것이 특히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1차적인 방어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또 다른 정신분석가인 Heinz Kohut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self)를 유지하고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타인의 반응(selfobject functions)을 필요로 한다. 적절한 타인의 반응은 인간에게 심리적 산소(psychological oxygen)처럼 작용한다.


이는 곧,

나와 대상 사이의 경계는 누구에게나 완전히 분명하지 않으며,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른바 ‘나르시스트적’ 특성은 우리 모두에게 일정 정도 존재하며, 그 강도와 일상 기능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누군가를 쉽게 ‘나르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유무(on/off)의 문제가 아니라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며, 개인의 성격 발달 수준과 대인관계 기능, 그리고 최근의 스트레스 정도(힘들면 당연히 남들의 반응에 기댈 수 밖에 없다.)에 따라 달리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DSM-5에서 NPD 진단 기준을 비교적 극단적인 경우로 한정한 것도,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낙인찍기를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결론적으로,

‘나르시스트’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심리적 특성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만, 이를 쉽게 공격적인 낙인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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