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으로 가치를 증명해왔던 한국사회

by 열혈정신과

한국 사회를 “피학성(masochistic) 성격구조”가 집단적으로 발달한 사회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다. 특히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를 보면, 이 구조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는 생존을 위해 헌신과 고통을 미덕으로 삼았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것’은 단순한 역할 수행을 넘어,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여성들은 개인적 욕구를 억누르고, 가족과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당연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고통은 이상화되었고, 고통을 참아야만 사랑받을 수 있으며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심리적 패턴이 내면화되었다.


며느리들은 집안에서 제일 일찍 일어나서 제일 늦게 잠들었고, 집안일은 물론 시댁 어른들 눈치나 구박도 달게 견뎌야 했다. 무슨 일이든 집안 제일의 일꾼 취급이었던 것도 물론이다. 시집살이 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헌신과 희생은 일단은 무상이었지만 마음 속까지 완전히 공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는, ‘나는 이만큼 희생했으니, 나중에 반드시 인정받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기대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이 기대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침묵 속에서 전해졌다.


무의식적 부채감이 다음 세대에게 조용히 전이되었다. ‘네가 잘 되면 그것은 나의 헌신 덕분이다’, ‘너는 나를 돌보고,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지만, 말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점이 피학성 구조의 본질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 구조는 고부갈등이라는 형태로 명확히 드러난다. 어머니 세대는 자신이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한 만큼, 며느리나 자녀들도 자신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보상하고 헌신해주기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한다.


시어머니 “내가 너희를 위해 헌신했잖아.”


하지만 젊은 세대, 특히 며느리들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들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과거 세대가 가졌던 ‘고통을 통한 존재 증명’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며느리 ”저한테 언제 헌신하셨는데요?”


이 충돌은 단순한 성격 차이나 생활방식 차이를 넘어, 삶의 의미와 존재의 정당성 자체를 둘러싼 깊은 심리적 갈등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자기주장을 이기적이라고 느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희생 강요를 질식감으로 느낀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토록 고생했는데’라는 정당성을 갖고 있고, 며느리는 ‘왜 당신의 고통을 나에게 전가하려 하느냐’는 반발심을 갖는다.


서로 다른 심리적 세계가 충돌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명절 준비나 육아 방식 같은 사소한 문제로 갈등이 폭발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깊은 층위의 무의식적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집단적으로 ‘고통을 통한 존재의 정당화’라는 피학성 심리구조를 내면화해왔다.


그리고 이 구조는 세대 간, 가족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심층적 원인이 된다.


고통을 사랑의 증명으로 여긴 세대와, 고통 없이도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세대 사이의 무의식적 충돌이, 오늘날의 고부갈등, 가족갈등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아들 집안에 심하게 간섭하고 장모가 딸 집안에 간섭하는 것이 시어머니나 장모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본인 아들/딸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심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아마도 본인의 희생을 인정받고 싶은 무의식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일 거다.


한국 사회가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면 가족주의가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유지되는 피학적인 가족주의라면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각자가 덜 유착된 상태에서, 자기 의견을 존중받으면서,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지 않으면서도 가족으로 결합할 수 있다면, 아마도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10% 는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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