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만차의 기사'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Aldonza>라는 넘버인데, 이 뮤지컬에서 알돈자는 주점에서 일하며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스스로도 더럽고 천하다고 느끼는 가난한 여성이다.
그녀는 그것을 미화하지도 않고,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돈 키호테는 알돈자가 자신이 찾던 공주 둘시네아라며 칭송하자 알돈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렷하게 말한다.
도랑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에게 버려졌다. 부엌 하녀, 똥더미에서 태어나, 똥더미에서 죽을 여자. 남자들이 쓰고 버리는 여자.
자신에게 퍼붓는 비난이지만 과장되지도 않았고, 비약도 없다. 말 그대로, 모두 다 맞는 말들이다. 팩트다. 그래서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뮤지컬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결국 ‘둘시네아’가 되는 장면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현실을 부정하고 환상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이 주는 감정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돈키호테는 알돈자를 둘시네아라고 부른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름을 부르며, 그녀 안에 있는 가능성과 존엄, 잃어버린 어떤 빛을 꺼내보려 한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건 그 지점이다.
팩트가 아니라 시선이다. 현실이 아니라 태도다. 그리고 진실은, 때로 그런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팩트는 보통 진실의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팩트는 단면이다. 팩트는 정사영이다. 입체적인 사물을 한쪽 방향에서 비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정사영은 실체를 왜곡하지 않지만, 실체를 충분히 드러내지도 않는다. 어떤 사물을 위에서 보면 원처럼 보이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처럼 보일 수 있다.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지만, 진실 전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어린 자녀가 추래한 행색의 폐지줍는 노인을 보고 “더러워. 냄새나. 거지 같아.”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부모가 "너 대체 무슨 말버릇이야!" 라고 화를냈더니 아이가 "내가 말한게 틀린게 뭐가 있어요!"라고 대들었다면 어떨까?
그 말이 왜 팩트가 아닌지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시선은 너무 납작하다. 그 노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시간을 건너왔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을 규정하고, 축소하고, 잘라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팩트의 위험이다. 틀리지는 않더라도 그게 모든 진실은 아니다.
가장 끔찍한 일은 그 위험한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댈 때다.
“나는 실패했고, 나는 못났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 말도 대체로 맞을 수 있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느껴지고, 그런 증거들은 충분히 떠오를 수 있다.
삶에서 실수했고, 관계에 실패했고, 기회도 잃었고, 자존감도 부족하다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지점에서 삶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그렇지만 정사영으로만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입체적으로 볼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된다. 다른 가능성, 다른 서사, 다른 방향의 빛은 차단된다. 팩트가 진실을 가로막는다.
물론, 사실을 부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면을 넘어서 보려는 시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있을지도 모를 둘시네아를 상상해보려는 용기가 오히려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게 사람을 무너뜨리는 팩트의 그림자 속에서도,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