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를 위한 변명
“꼰대 진단 테스트 한번 해보실래요?”
지인이 SMS를 통해서 재미삼아 해보라며, 꼰대 성향 테스트를 전달해주었다.
이 검사는 8개의 꼰대 유형과 각각의 레벨이 있는 검사였는데,
“레벨 3, 요란스러운 처단자”
이것이 나의 몇 개의 문항을 입력한 후 받아본 결과였다.
전체 레벨 5단계 중에서 3단계이면 중급 이상이고, 성향도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특히, ‘요란스러운 처단자’의 대처법이라고 내놓은 해결책이 ‘이 사람에게 나는 YES 맨이다’, ‘앞에서만 알았다고 하자’라는 말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재미삼아 해보라는 지인의 말처럼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얼마 후 타 부서와 업무가 엮긴 일로 내가 전화기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다.
옆에 있는 후배 직원은 그것을 지켜본 후 내게 말했다.
“차장님 진짜 요란스러운 처단을 하시는 것 같아요..”
....
“내..내가요..?”
그 뒤부터 내가 중증 ‘꼰대 기질’의 실천자가 된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떤 게 과연 꼰대일까..
외관상으로는 통상 TV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앞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나온, 왠지 커피 냄새와 담배냄새가 섞인 입냄새를 풍기며, “나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 것 같은 아저씨의 이미지로 기억하지만, ‘젊꼰’(젊은 꼰대), ‘여꼰’(여자 꼰대)라는 말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는 걸 보면, 꼰대는 나이나 성별 불문, 외모 불문이 맞는 것 같다.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타인의 관심만을 갈구한 채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나이와 외모를 불문하고 그는 꼰대가 된다.
꼰대의 행동들을 정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그간의 부서장의 모습 하나하나를 언어로 풀어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굽히지 않는 아집, 시작은 소통 목적이나 결과는 일방적인 전달 위주의 대화, 취향의 강요, 정치적 신념의 관철, 끝내 통화지 않으면 늘 결론은 역정. 등등
그야말로 꼰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또는 공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만한 특징으로 충분할 것이다.
나도 그러한 적이 있다.
후배 직원들에게 술을 사준다고 불러내서는 그 술값 이상으로 얹어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신입직원의 자세에 대해서 일장 연설 같은 전달을 한 적도 있다. 내 말만 해댔다.
어느새 나는 내가 싫어하는 이들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가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않고 나의 주장으로 화를 냈으며, 적극적인 공감이나 소통 또한 소홀히 하길 일쑤였다.
꼰대는 일단 되면, 생활에 이미 그 기질이 배고 그 행동에도 아집이 생겨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꼰대 기질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꼰대는 명사형의 명사이지만, 기질은 동사형의 명사로 인식되는 이유에서이다.
기질은 변화된 상태가 아니라 그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그 레벨에 상관없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결혼생활이 파국이 되면 이혼이 되지만,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면 비록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불행의 파국까진 치닫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도 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도 엄연히 사회의 초년생이었고, 현재의 그들은 예전의 그들을 통해서 당하며 배워왔다. 일이든 태도든, 방식이든.
그리하여 그들은 새내기에서 꼰돌이로, 그리고 꼰대로 되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어느 위치에 오르게 되면, 서로의 친숙함에 익숙해져 무례하게 되면서 기어이 그들은 변신했다.
특히 술 문화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직장문화에서, 소위 업무의 연장선인 술자리에서 난감한 경우가 많다.
술에 취한 척, 술의 힘을 빌려, 자신만의 야야기를 다하고, 심지어 욕을 하고, 때로는 주먹다짐도 한 후에, 다음날 배시시 웃어가며, ‘의례 남자들끼리 술 먹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너스레를 짓는 상사들이 아직까지 멀쩡하게 지내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분명 물리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때린 사람은 ‘쿨’ 하셔서, ‘우린 뒤 끝이 없어~’ 하지만
마지못해 견딘 사람은 정말 그 상처가 오래가기 마련이다.
권위, 복종 등의 일방적인 단어들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 그들의 문화의 편협함들이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그릇되게 비춰질 수 있다.
물론 나조차도 그것에 예외일 순 없다.
우리 시대를 일으켜온 것도 일부 그들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하고, 조직의 부름이라는 거시적인 포장으로 자신의 속성을 숨기려는 특징의 사람들은 담배와 커피가 쩐 입냄새만큼이나 불편한 것은 매 한가지다.
자신을 굽힐 줄 알고,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포용이라고 삶에서 배웠다.
좁아지는 양방향 도로에서의 일방통행은 병목현상과 이어져 정체를 일으키듯,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곳에서의 일방 통행적인 전달은, 분위기의 병목현상을 일으켜 관계의 정체를 낳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듯, 마땅한 결과도 노력도 더딜 뿐이다.
언어적인 전달뿐만이 아니다. 비언어적인 정서적인 감정도 분위기를 충분히 지배하기 마련이다.
자신만의 감정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의 강요는 감정적인 정체현상을 낳기에 충분하다.
꼰대 행동이라 불리는 관심 병적 행동들은 바로 그 일방적인 감정 전달의 아주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역으로 공감능력이 부족한 관심병의 증상들은 바로 꼰대 행동이라 봐도 무방할 듯도 하다.
아름다운 대화 또는 소통이라는 것은 서로의 말들이 적절히 섞일 때 일어난다는 걸 망각한 채, 타협의 여지가 없는 언어의 또는 감정의 전달자가 된 순간 그는 진짜 ‘꼰’이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도 비판적으로 자신의 꼰성(性)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의 어떤 편 도, 어떠한 대의명분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꼰대들은 외롭고, 더 관심종자가 되는 수순인 것이다.
주변의 꼰대를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이 점차 꼰대가 되어간다는 걸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 그전에 사유하고 돌아보자.
사유와 반성이 없으면 진정한 꼰대가 된다.
세상이 변했다.
시대가, 세태가, 세대가 바뀌었다.
최초의 그들도 사회생활을 통해서 꼰대의 방식이나 태도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당한 만큼 체득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게 불편해도, 잘못되었다고 알더라도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을 겪고 지나온 이후의 바뀐 세대는 더 이상 그 방식이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할 수가 없다.
꼰대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민주적인’ 시대적 환경에서는 하는 수 없이 꼰대들도 변해야 한다.
바꿔야 한다.
나는
중증 꼰대 기질의 실천자? 아니
적어도 중급 이상의 괜찮은 선배로 남고 싶다.
참고사이트 : https://www.lllkkdti.com/ (꼰대 성향 테스트)
사진 출처 :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18/20191218001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