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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Nov 02. 2020

할머니.

민들레와 삼겹살

날씨가 선선해지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을 흰 종이에 적어본다.

할머니.


할머니는 유독 자기애가 강하신 분이셨다. 

작은 체구의 고집이 세던 할머니는, 보통의 노인분들의 푸근하고 편안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말로는 ‘꼬장꼬장’한 분이셨던 것 같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직장 생활을 하셨던 까닭에, 나와 형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보낸 시간들이 많았다.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 시절의 여느 노인들의 취미처럼, 종종 담배를 태우시곤 했는데 나는 유독 그 냄새가 싫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비흡연자가 된 것도 어쩌면 담배 냄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각인시켜 준 할머니의 덕분인지도 모른다. 


민들레 달인 약초물


할머니를 떠올릴 때, 같이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민들레 달인 물이다. 

고3 시절, 시기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살았고,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어느 날 민들레를 달인 약초물을 한 컵 건네주셨다.

“네가 저번에 그 돼지고기를 먹고 체한 게 안 내려간 모양이다. 오래전에 체해서 속이 안 좋은 데에는 이게 잘 듣는다고 해서 내가 시골에 가서 민들레는 따서 달였어.”


할머니는 나도 기억해내지 못한 그 ‘돼지고기를 먹고 체한 사건’을 떠올리신 것이다. 

그걸 한 컵 따라 주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그 효과와 성분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물을 받아 마셨다. 

그걸 마시고 그다음 날부터 낮동안 배에 가스가 계속 차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약초물이 나에게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매일 저녁 그 약초물을 권하셨고, 나는 낮동안 끊임없이 속에 가스가 차는 현상을 겪게 됐다. 

그리고 4일째 되는 밤, 나는 더 이상 그 약초물이 효과가 없음을 할머니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쓰며, 검색해보니 민들레 달인 물은 간 해독에 효과가 있고, 소화를 촉진하지만, 위장이 차거나 예민한 경우에 점막을 자극하여 가스가 차고 속이 더부룩해진다고 한다.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가스 증상으로 고생하긴 했으나,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았던 나를 위해 건네주셨던 할머니의 마음은 아주 따뜻하게 간직되고 있다. 

삼겹살, 소주.


첫 직장의 입사가 확정되고 나서, 입사 전까지 고향의 집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손주가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며, 할머니가 기뻐하시면서 사주셨던 것이 삼겹살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나.

세 사람은 저녁에 동네에 새로 생긴 식당으로 향했다. 

삼대가 소주잔을 놓고, 삼겹살을 도란도란 굽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는지, 식당의 여자 사장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손주가 취업을 했다고 삼겹살에 소주를 사주시는 광경은 누가 봐도 흐뭇하고, 보기 드문 광경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날이 살살 풀리는 3월, 나는 그 직장에 입사를 하게 됐고, 할머니는 그 겨울이 지난 봄부터 조금씩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을 초입, 할머니가 입원해 계신 고향에 문병을 가게 됐는데, 그때 나는 할머니가 나를 보며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불과 두 계절 전에 나와 삼겹살에 소주를 같이 드시던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지금은 반가운 마음에 내게 큰 소리로 하시는 말씀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말씀을 옆에서 어머니가 통역을 해주셨다. 

‘손자들 중에 가장 열심히 사는 훌륭한 손자라고, 최고라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할머니는 이틀 뒤 돌아가셨다. 

주말에 고향에서 할머니를 뵙고 돌아와, 월요일 출근 후 오후에 부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날 내가 들었던 할머니의 알 수 없는 말씀은 곧 내게 남긴 유언이셨던 셈이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도 손주인 나를 칭찬하고 응원하셨던 것이다. 


오래전에 알 수 없는 약초물을 건네며, 나를 위로하셨던 할머니는,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저녁을 사주시며 나를 응원해주셨고, 마지막까지도 나를 격려해주셨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쯤, 돌아가신 할머니가 더욱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이때쯤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선선해지고 외롭던 마음에 알 수 없게 전해지던 할머니의 위로와 응원이 그리워서 일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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