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2020년 3월,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고모님께서 몇 달 전부터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계셨다.
갑자기 어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오늘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필이면 이 어려운 시기에, 코로나의 여파로 누구도 문상 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이 시기에.
고모님은 하늘도 무심하게 돌아가셨다.
물론 나도 솔직히 조문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이지만, 집에 10살 6살 두 아이를 아내가 재택근무하면서 하루 종일 돌보고 있고, 내가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가격리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큰 고모님께 인사는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밤늦게 차를 타고 가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접촉하지 않는 방향으로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넘어서 약 1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장례식장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산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고모님의 아들인 상주들 조차도 마스크를 쓰고 손님을 맞았다. 그래도 첫날이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카들 중에는 내가 처음으로 온 모양이었다.
영정사진에 웃고 계신 고모님께 절을 드리고.. 고모들과 숙모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런데 그 테이블 한쪽에서 상주들도 친척분들도 다 쓰고 계신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로 혼자 소주를 드시고 계신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이 하시면서도 혹시나 내가 못 오진 않을까 하여 마음도 쓰인 눈치셨다.
아버지는 고모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향에서 급한일을 처리하시고 오시는 바람에,
동생이 임종할 때의 모습도 보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그렇게 소주잔을 혼자 씁쓸히 비우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장례식장에서 마치 고향집에서 만난 것처럼,
돌아가신 고모님 이야기, 새로 구입할 차 이야기,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오랜만에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자리에 앉은 지 30분이 조금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다시 밤늦게 운전해서 가야 하는 나를 걱정하며 빨리 가라고 재촉하신다.
그곳에서 3일 동안 계실 아버지도 걱정되었지만, 또 집에 있을 두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나는 아버지께 등 떠밀리듯 자리를 일어났다.
올해 여든이 되신 아버지가 동생의 죽음 앞에 슬퍼하시면서도, 다시 아들인 내 걱정인 것이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아버지가 내게 한마디 하셨다.
“와줘서 고맙고, 덕분에 아버지 면도 살았다 ”
그 한마디에 고모님의 빈소에서도 차분했었던 내 감정이 마구 흔들렸다.
목이 메어오는걸 꾹 참으며 나는 “아버지, 마스크 꼭 쓰시고, 손 자주 씻으시고, 약주 너무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차로 향했다.
그렇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잘못되는 걸 바라겠는가.
자식이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시면서도 내심으로는 사람의 도리는 다해줬으면 하는 게 아버지의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렇게 출렁거리는 마음을 겨우 잡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빠 언제 와. 아빠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릴 거야”
10살짜리 아들 녀석이 밤늦게 오는 내가 걱정됐는지 그렇게 문자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삼 대는 서로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며, 그날을 보냈다.
언젠가 이 어지러운 시절이 지나면,
모두가 웃으며 맛있게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내 아이가 커서 할아버지와 함께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꼭 기대해본다.
슬픔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했던 오늘이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