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 1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남편은 두 달째 해외 출장 중이었고, 그 날은 유난히 일이 많아서 늦도록 아이들을 재우지 못했다.
보통 9시에 재우는 아이들이니, 점점 피곤했을 텐데 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 11시가 넘어가자 1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다가, 결국 짜증을 넘어선 감정 폭발이 일어났다.
여덟 살 아이가 화를 내봤자 얼마나 내겠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모두가 쳐다봤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쉽게 '분노조절장애'라고 이름 붙였다. 나에게는 성인 남자가 화를 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일곱 살부터 1호는 그런 모습을 반복해왔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힘들었고 두려워서 ‘지금 이 자리에서 2호만 데리고 나가야겠다. 나는 1호를 키울 수가 없겠다. 나는 저 아이와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고, 나는 저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고 지금 돌아봐도 너무나도 끔찍한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며칠 후, 놀이치료가 끝나고 선생님께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 그래서 결국 1호를 두고 그만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를 위로한 후 선생님이 물었다.
“어머니, 여덟 살짜리 아이가 그렇게 무서우세요? 어머니가 힘도 더 세시잖아요”
그렇다. 내가 힘도 더 세고, 목소리도 더 크고, 어른인데... 나는 아이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무섭고 떨리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는 걸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얘기해보자)
“네.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어머니, 그런데요. 그 순간에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을 것 같으세요?”
이 한마디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나는 내 두려움에 빠져서 1호의 고통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1호가 분노를 표출한다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고통의 표현이라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평소에도 피곤하면 짜증을 내는 아이였기에 그것이 '지금 내가 힘들어요'라는 의미라고는 전혀 몰랐다.
짜증 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생각하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피곤하면 그냥 자던데, 너는 왜 그러니'.
나는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1호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연민으로 몇 날 며칠을 지냈다.
이후에도 1호는 여전히 그렇게 나에게 힘든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대응하다가, 결국 가만히 안아주는 방법을 택했다. 가만히 안아주는 것은 아이를 빠르게 진정시킬 수 있었고,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1호는 그런 순간에 나의 포옹을 거절하지 않는다. 아마 1호도 멈추고 싶어도 멈출 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자신도 폭발하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를 설득시키거나 가르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안아준다. 아이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그 변화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도 알고, 주변의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알아차릴 정도이다.
이 아이는 지금 14살이다. 여전히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침마다 침대에 와서 엄마 아빠 사이에 파고들어 어린양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여전히 잔소리하고 버럭질도 하고 혼내기도 하지만 잊지 않고 꼭 하는 것은 매일 아침과 잠자기 전에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함께 웃는 시간을 늘리는 것. 하루 일과 중에도 사랑을 자주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아이가 화를 내면 내 목소리는 더 차분해지고 아이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갖는다.
비폭력대화(NVC)를 창안한 마셜 로젠버그는 "폭력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비극적 표현"이라고 했다.
누군가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때, 그가 자신의 고통을 비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상처를 주고받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편안해졌고, 행복해졌습니다.
제 자신을 수용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삶에 감사하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이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실수를 되풀이하면서요.
다만, 이 글이 누구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