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이야기]
*이 글은 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인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미국발 슈퍼히어로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 ‘한국형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부재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 헐크 등 마블코믹스에서 내놓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각국의 극장가를 휩쓸고 한국까지 점령한 상황이다. 오는 27일 개봉되는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역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등 ‘어벤져스’ 시리즈의 인기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벌써부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앞서 공개됐다 국내 흥행에 실패한 DC코믹스의 ‘배트맨 대 슈퍼맨’도 화제성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 악당들로 구성된 팀을 보여주는 DC코믹스의 후속작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8월 개봉을 앞두고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안타까운 건 미국 내에서만 통할 듯했던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의 인기가 국내 시장까지 뒤덮고 있는 와중에 막상 한국형 히어로라 부를만한 캐릭터가 없다는 사실이다.
홍길동, 대표적 한국형 슈퍼히어로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대표적인 예는 홍길동이다. 조선시대 허균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니 역사를 따지자면 할리우드의 1세대 슈퍼히어로 캐릭터라고 할 만한 슈퍼맨이나 배트맨의 조상뻘이다. 무술에 능하고 축지법과 분신술 등 온갖 도술을 사용하며 약한 자를 돕는 의적으로 그 능력이나 활약상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를 능가한다. 출생에 얽힌 애달픈 사연, 그리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계기 등 드라마틱한 인생사 역시 흥미롭다.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의 성공조건을 홍길동 역시 충분히 갖춘 셈이다.
그래서 유사 캐릭터 중 홍길동을 소재로 내세운 콘텐츠의 수가 가장 많다.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역시 ‘홍길동’(1967)이었다. 신동우 화백이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만화를 토대로 신동우 화백의 형 신동헌 감독이 애니메이션화했다. 이어 신동헌 감독은 ‘홍길동’의 스핀오프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또 다른 홍길동 시리즈를 후속으로 내놓고 흥행 바람을 일으켰다. 1990년대에는 김민종, 채시라, 신현준 등 인기 배우들의 더빙으로 완성된 애니메이션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외 ‘홍길동 장군’ ‘의적 홍길동’ 등 수차례 실사영화가 나오기도 했으며 비슷한 제목의 드라마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슈퍼 홍길동’이란 타이틀의 영화가 업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심형래가 주연을 맡았던 1편에 이어 김정식, 이창훈, 이봉원 등 당시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던 개그맨들이 홍길동 역을 맡았으며, 1990년대 초까지 10여 편의 시리즈가 제작됐다. 하지만 홍길동이란 캐릭터를 살려낸다기보다 인지도에 힘입어 조악한 완성도로 ‘한철 장사’를 하는 수준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 '탐정 홍길동' 홍길동 캐릭터 재해석
2000년대에도 홍길동을 소재로 한 콘텐츠 제작이 이어졌다. 이범수 주연작 ‘홍길동의 후예’가 있었고, 최근에는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이 차기작으로 ‘탐정 홍길동:사라진 마을’을 들고 나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5월 4일 개봉되는 이 영화에는 배우 이제훈이 홍길동 역을 맡았다. 홍길동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해석했으며 정 없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본성이 선하지도 않은 색다른 인물로 재탄생시켰다.조성희 감독은 최근 이 영화의 제작보고회에서 “고전 속 홍길동은 조선시대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사회에 맞선 진취적인 인물이다. 또한, 정의 구현을 위해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캐릭터의 특징을 부각시켜 현대적으로 만들어봤다. 신념도 정의도 없는 캐릭터가 어떻게 변화하며 얼마나 매력적으로 완성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적인 영웅상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된 한국형 슈퍼히어로
홍길동의 경우 어린이용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까지 다양하게 제작돼 한국형 히어로 캐릭터의 전형이 됐다. 다만, 해외까지 진출할 수 있을 정도의 입체적인 매력을 갖추지는 못해 아직까진 ‘내수용’이란 말을 듣고 있다.
그 외에도 고전에 기반을 두고 변주된 한국형 히어로 중에는 전우치와 일지매 등이 있다. 전우치는 고전문학 ‘전우치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한국형 슈퍼히어로다. 아예 도사로 설정돼 온갖 도술을 쓰며 요괴와 싸운다. 초월적인 능력만 따지면 홍길동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이후 매체를 넘나들며 악동 캐릭터로 변주돼 매력을 추가했다. 강동원 주연의 영화 ‘전우치’로, 차태현이 출연한 동명 타이틀의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일지매는 1970년대 중반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를 통해 알려진 캐릭터다. 설화에 기반을 둔 캐릭터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인물이다. 1993년에 장동건 주연의 동명 드라마로 주목받았고, 2008년에도 이준기를 내세운 동명 타이틀의 드라마가 나와 인기리에 방영됐다.
2009년에도 일지매를 주연 캐릭터로 제작된 애니메이션과 정일우 주연의 드라마가 공개됐다. 그보다 오래전인 1978년에는 ‘날으는 소년 일지매’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됐다. 한 명의 스승 밑에서 수련한 여러 명의 소년 일지매가 전국으로 흩어져 악한을 처단하는 과정을 그렸다. 일지매를 어린 소년으로 설정하고 당시 아시아권에 큰 영향을 주던 홍콩 무협영화의 느낌을 반영해 흥행에 성공했다.
‘슈퍼’히어로라고 부르긴 힘들지만 실존인물로 알려진 도적 임꺽정이나 허영만 화백의 만화에서 탄생한 각시탈 등도 한국형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국내에는 ‘슈퍼’급 히어로보다 좀 더 현실적인 ‘생활 기반형 영웅’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공의 적’을 통해 탄생한 강철중 등의 캐릭터가 그런 예다. 해외 캐릭터 뱀파이어를 차용해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반응이 좋지는 않았지만 김수로 주연의 영화 ‘흡혈형사 나도열’이 있었고, 최근에는 ‘뱀파이어 검사’ ‘뱀파이어 탐정’ 등의 드라마가 있다.
잘 만든 캐릭터 하나, 대기업 매출 부럽지 않아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다. 웹툰에서 드라마로, 또다시 웹툰으로 넘어오며 스토리를 풀어내는 ‘미생’, 그리고 ‘송곳’ 등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잘 만들어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면 ‘캐릭터 스토리텔링’은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로 승부를 보는 방식이다.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 활용법을 살펴보면 된다. 코믹스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플랫폼을 넘나드는데 그 중심에는 ‘이야기’보다 ‘캐릭터’가 있다. 대중을 홀린 캐릭터의 힘으로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또 풀어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의 힘은 대중을 움직여 문화를 이끄는 것뿐 아니라 많게는 수백억원대의 매출로 산업을 쥐락펴락한다.
국내의 경우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구현될 만한 구조는 갖춰졌다. 그러나 뽀로로 등 아동 콘텐츠 외에는 캐릭터 미디어 스토리텔링이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단순히 수년 만에 한 번씩 미디어플랫폼을 바꿔 재생산되는 방식에 그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매력을 부각시키고 폭넓게 그 영향력을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