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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May 17. 2016

'엽기적인 그녀'의 몰락

[대중문화 이야기]

*이 글은 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인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아쉬운 일이다. 2000년대 초반, 당시 덜 영글었던 한국 영화산업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됐던 ‘엽기적인 그녀’가 어설픈 후속작 때문에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됐다. 지난 12일 개봉된 차태현-빅토리아 주연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 2’는 개봉 첫날 1만5천192명을 모으는 데 그치더니 이틀 후부터 박스오피스 순위 5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마블사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흥행 공세에,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곡성’까지 개봉돼 스크린을 점령한 상황이라 반등을 노리는 것도 쉽지 않다. 종종 작품에 대한 평가가 좋은데도 불구하고 대진운이 나빠 초반에 저조한 성적을 받다가 흥행 가도에 오른 영화가 있긴 하다. 하지만 ‘엽기적인 그녀 2’는 평단뿐 아니라 작품을 본 관객 사이에서도 혹평이 이어지고 있어 더 이상 상승세를 기대하기 어렵다. 성공한 전작의 아성에 힘입어 ‘한철 장사’를 하려다 타이틀에 상처만 남겼다. 



전지현-차태현 주연의 '엽기적인 그녀' 


‘엽기적인 그녀’ 충무로 상업영화 방향 제시


2001년 개봉된 전지현-차태현 주연의 ‘엽기적인 그녀’는 48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통합전산망이 구축되기 전의 일이라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 사실 이보다 더 많은 관객이 들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연간 천만 관객을 모으는 영화가 두어 편씩 나올 정도로 영화산업 전체가 성장한 상태지만, 당시로선 ‘엽기적인 그녀’ 정도의 스코어라면 ‘초대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공적인 기록이었다. 

이 영화는 PC통신에 이어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새로운 문화로 떠오른 동명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든 작품이다. 젊은 층에서 트렌드로 확산되고 있는 인기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자체만으로 기대감을 형성했던 영화다. 


2000년대 초반 온라인 상의 트렌드를 반영해 큰 사랑을 받은 '엽기적인 그녀'의 스틸사진


이별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괄괄한 성격의 여자와 그를 사랑하게 된 평범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통통 튀는 에피소드와 두 주연배우의 연기 궁합이 잘 맞아떨어져 시종일관 관객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당대 인기스타 차태현은 이 작품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타이틀롤을 맡은 전지현은 ‘CF에서만 통하는 스타’라는 오명을 벗고 연기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데뷔한 곽재용 감독은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 성공으로 충무로는 물론이고, 향후 중국 활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러티브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감정선 등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기적인 그녀’는 ‘쉬리’의 흥행 성공 이후 충무로에 불어닥친 어설픈 블록버스터 제작 붐에 일침을 가하며, ‘한국시장에 어울리는 코미디영화’의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 됐다. 이 영화는 2003년 초 일본에서 개봉돼 약 5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중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한류 붐을 일으켰다. 2008년에는 ‘마이 쎄시 걸’이란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으며, 같은 해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눈길을 끌었다. 현재 충무로에서도 사극판 ‘엽기적인 그녀’를 기획 중이며 이미 주원이 캐스팅된 상태다. 


차태현과 빅토리아가 주연을 맡은 '엽기적인 그녀2'의 기자간담회.


'엽기적인 그녀2' 어설픈 완성도로 혹평

반면, 15년 만에 나온 후속작 ‘엽기적인 그녀 2’는 전편에 못 미치는 재미와 완성도로 혹평을 받고 있다. 전작의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차태현이 투입돼 시리즈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걸그룹 에프엑스 멤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중국인 빅토리아가 전지현에 이어 ‘그녀’의 역할을 맡았지만, 군데군데 드러난 커다란 단점들로 인해 ‘총체적 난국’이란 표현에 적합한 영화가 됐다. 

전편은 전지현과 차태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재회하는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둘의 행복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 그런데, 후속작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뜬금없이 ‘전지현이 비구니가 돼 다시 차태현이 솔로남이 됐다’는 설정을 가져온다. 이 때문에 전작 및 전지현의 팬들 사이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아무리 코미디영화라 해도, 큰 사랑을 받았던 전편의 결말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렸으니 팬들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고는 차태현이 새로운 여자 빅토리아를 만나 빠른 속도로 결혼에 골인하고 둘의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때부터 빅토리아는 연애 시절에는 크게 드러내지 않았던 ‘엽기’적인 행각을 펼치며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애쓴다. 전작에서 전지현에게 크게 당했던 차태현은 “왜… 또?”를 외치며 ‘엽기적인 그녀’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엽기적인 그녀2'의 스틸사진 


한국시장 배제, 중국시장만 노린 영화

상황만 보면 코미디영화의 시리즈로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문제는 결국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다. ‘엽기적인 그녀 2’는 개연성 없는 전개와 설득력 떨어지는 캐릭터 및 연출 등 혹평받을 요소를 두루 갖췄다. ‘그해 여름’ 이후 10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중견 감독 조근식의 연출은 48세란 나이를 인증하듯 시대에 뒤처진 감각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미 이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무리수라는 말을 들었다. ‘엽기’라는 단어는 15년 전 인터넷상에서 트렌드처럼 번졌던 코드다. 한물간 유행을 다시 현시대로 끌고 와서는, 그것도 어설픈 만듦새의 결과물을 들고 와 “한번 웃어달라”고 요구하는 자체가 뻔뻔스러운 일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타이틀롤인 전지현이 빠진 상태에서 차태현만 내세워 속편을 만든 것 역시 이해가 안 간다. 차라리 두 주연배우를 제외하고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괜히 전편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욕심을 부렸다가 팬들의 원망만 사게 됐다. 영화계 인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 요구에 응한 차태현의 마음 씀씀이가 아쉬울 따름이다. 

영화에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 빅토리아를 투입한 것이나 배우들의 오버액션 강도, 그리고 이를 보조하듯 쓰이는 CG 등을 보면 아예 한국시장을 배제하고 중국을 겨냥한 듯한 인상이 강하다. 빅토리아의 한국어 대사는 귀에 거슬리고 차태현과의 호흡도 조화롭지 않다. 중국시장에서 한탕 해보겠다는 상술로 잘나가는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만 입혔다. 


전작의 장점을 살려내지 못한 '엽기적인 그녀2'의 한 장면


중국에서도 이미 참패

그렇다면 중국시장에서라도 잘됐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엽기적인 그녀 2’는 중화권에서 참패한 상태다. 지난 4월 중순 중국에서 무려 7천500여 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릴리즈됐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탕웨이가 주연으로 출연한 ‘시절인연 2’ 등 화제작에 압도당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첫 주말 중국 박스오피스 순위 4위에 그쳤고 관객들로부터 ‘형편없다’는 평가를 들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의리’를 지키겠다면서 출연한 차태현의 노력이 아까워지는 결과다. 

중국 관객 역시 15년 전 전작과 후속작 사이의 연결고리를 쉽게 찾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 보여준 극 중 차태현의 고된 사회생활, 또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보여준 엽기적인 신부 빅토리아와의 결혼생활에도 공감하지 못했다. 

전작의 감독 곽재용이 여전히 중국 시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오기환 등 다른 한국 감독들도 중화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부작용도 상당하지만 중화권이 한국 대중문화산업의 또 다른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어설픈 영화에 마케팅 비용만 추가해 단시간에 관객몰이를 해보겠다는 얄팍한 상술은 반대다. 그들 눈에는 관객이 호구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급되는 제품의 수준이 적당 수준은 되어야 수요도 따르는 법이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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