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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Jun 10. 2016

가면 뒤의 힘 '복면가왕'

[대중문화 이야기]

*이 글은 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인사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색안경을 벗어던지면 가시거리 안에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들리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지를 보며 귀를 여는 것과 눈을 감고 소리에만 집중할 때 그 감흥은 달라진다. 이미지와 소리가 합쳐져 시너지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각자 흩어져 혼자일 때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MBC ‘복면가왕’은 후자다. 가창자의 얼굴에 가면을 씌워 정체를 숨기고 듣는 이들이 오로지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듣는 이들은 노래하는 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 음도 빼놓지 않으려 신경을 기울이게 된다. 자연스레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TV 공개형 음악프로그램인데도 눈을 감고 오디오를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장난기 넘치는 가면과 의상, 패널들의 유머가 곁들여져 흥미를 자아내지만 결국 ‘복면가왕’의 흥행을 좌우하는 주된 요소는 ‘듣는 재미’다. 지난 3일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TV 예능 부문 작품상까지 수상하며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핫한 예능 프로그램이었음을 입증했다. 


우스꽝스러운 설정`음악성 절묘한 조화


‘복면가왕’이 주목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스꽝스러운 설정 때문이다. 가수뿐 아니라 배우와 개그맨까지 노래 좀 한다는 이들을 출연시키되 가면을 씌워 상상력을 자극하는 등 기존에 없었던 콘셉트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새로운 예능을 찾던 방송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의 욕구까지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분명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독특한 콘셉트는 단기 처방 수준일 뿐 장기 레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못한다. 결국 ‘복면가왕’을 1년 2개월 동안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음악’ 그 자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복면가왕’은 녹화 현장에서 라이브 밴드의 연주에 맞춰 가창자의 노래를 들려주며 ‘듣는 재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한다. 무대 위에 오른 가창자는 자신의 얼굴을 몰라보는 청중과 시청자들을 향해 오직 최상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 집중한다. ‘이 무대가 마지막’인 양 정성을 다해 노래하니 듣는 이들이 감동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가수들은 숨겨진 음색 선보일 기회 

선곡도 주목할 만하다. 무대 위에 올라가는 가창자들의 취향 등에 따라 부르는 곡이 정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두 명의 가창자가 듀엣으로 노래하며 경쟁하는 1라운드의 경우에는 흘러간 옛 인기가요에 팝송까지 곁들이며 폭넓은 연령대 시청자들을 공략한다. 

일단 1라운드를 통과해야 다음 코스로 진입한다는 중압감이 있을 법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창자들은 1라운드 대결 시 비교적 편안하게 노래하며 즐거움을 준다.

이어지는 2라운드부터는 본격적인 가창력 싸움이 벌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인기가요부터 올드팝, 영화음악, 뮤지컬 넘버까지 다양한 곡들이 듣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만들어준다. 가창력을 겨루는 무대라 어쩔 수 없이 고음 경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건 과거 ‘나는 가수다’ 시절처럼 듣는 이들이 지칠 정도로 고음에 집착하는 케이스가 많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창자들은 본인 목소리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데 신경을 기울인다. ‘가왕’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처음부터 칼을 갈고 나오는 이들도 있지만 승부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오른 출연자들도 많다. 고음 경쟁이 아니라 곡의 특징을 살려 듣기 편안한 음악을 제공하니 시청자들도 부담없이 즐기게 된다. 결과적으로 ‘가왕’의 자리에 오르는 이들의 상당수가 고음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가창자라는 것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동안 들려준 적 없던 목소리의 장점을 각인시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도 많아 다양한 재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오롯이 노래에만 집중…가창력 진면목 

개그맨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종 노래 실력을 과시할 때, 듣는 이들은 ‘노래 좀 하네’라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집중해 들어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연기자들이나 스포츠 스타가 노래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다고 해도 별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가수가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평소 가창력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던 가수라면 기존의 이미지와 선입견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박수 받지 못한다. ‘복면가왕’은 오롯이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가창자와 대중의 만남을 주선한다.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가운데 지점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올리는, 소개팅이나 미팅 주선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현장에 있는 연예인 판정단의 오버액션이 가끔 거슬리기도 한다. 특별할 것 없는 목소리인데도 얼굴 근육을 있는 대로 동원해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각종 미사여구를 쓰며 포장한다. 가면을 벗고 정체가 드러나면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었어?”라며 또 한 번 감탄한다. 노래를 듣다 눈물까지 흘리는 일도 있다. 

이런 리액션이 과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연예인 판정단으로선 프로그램의 재미를 끌어내는 그들의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가면 쓴 가창자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분위기에 이끌려 빠져들게 된다. 판정단의 오버액션도 “직접 들어보면 그렇게 돼”라는 말로 설득이 가능해진다. 장난스러운 가면이 노래 감상에 방해가 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노래하는 사람의 정체가 숨겨져 있어 목소리에 대한 집중력이 더 좋아지고 곡의 기승전결을 따라가며 몰입하게 된다. 가창자가 누군지 모르니 선입견을 가질 일도 없다. 목소리만 좋으면 기꺼이 박수를 보내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고 곡이 끝날 때까지 그 상황만 즐기게 된다. 


음악대장-캣츠걸 등 ‘복면 효과’ 수혜자들

‘복면가왕’이 주선한 무대에 올라 수혜를 입은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왕의 자리에 오른 ‘캣츠걸’이란 캐릭터 가면을 쓰고 나온 뮤지컬 배우 차지연과 ‘우리동네 음악대장’으로 나와 10회 연속 가왕 자리에 오른 하현우가 빼놓을 수 없는 수혜자다. 차지연은 뮤지컬 배우로선 홍지민에 이어 두 번째로 가왕이 됐고 무려 5회 연속으로 경합에서 승리해 눈길을 끌었다. 

앞서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 김연우와 ‘소녀의 순정 코스모스’ 거미가 4회 연속 가왕의 자리를 지켰는데, 차지연이 이 기록을 넘어서면서 당시 ‘복면가왕’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로 불렸다. 그 뒤를 이어 ‘우리동네 음악대장’ 하현우가 10회 연속이란 경이로운 기록으로 역대 가장 뜨거운 이슈의 주인공이 됐다.


그 외에도 인상적인 랩 실력을 과시해 놀라움을 준 개그맨 김기리, 차분한 음색으로 가능성 있는 노래 실력을 과시한 아역배우 출신 서신애, ‘쉬즈 곤’을 부른 그룹 스틸하트의 보컬 밀젠코 마티예비치, 나이에 비해 성숙한 목소리로 판정단을 혼란스럽게 만든 걸그룹 레이디스코드의 소정, 현재 연예인 판정단으로 활동 중인 가수 조장혁 등 놀라운 반전 또는 노래 실력으로 화제가 된 출연자들이 많다. 

가면이라는 극적 장치를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복면가왕’ 무대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며 ‘복면 효과’를 극대화한 이들이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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