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날개 Sep 01.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오리손 예약을 못했어요”

[1일] #2 생장~ 오리손 (Refuge Orrison)


날이 갰지만 하늘이 한껏 열리지 않았다.
듬성듬성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 아래 풍경,
 가슴 깊은 곳에서 위안이 밀려왔다.



나를 스쳐 지나간 남성 트리오가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P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자, 선한 미소를 가진 남자가 나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서있다. 부담스러웠다. 저 기다림을 때문에 내가 더 빨리 걸어야 했으니! 헉헉 거리며 그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왜 기다린 거야?


선한 미소 남자의 이름은 로만손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오늘 론세스바예스까지 간다고요?"

P선생님한테 들은 얘기일 것이다.

"네, 오리손을 예약 못했어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천천히 걸어가는 통에 로만손과 내 얘기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했다.

개구쟁이 표정의 아저씨가 나를 돌아봤다.

"안 돼!"

뭐가 안된다는 거야? 길이 끊겼나?

로만손이 내 표정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속도로는 오늘 론세스까지 힘들어요."

P선생님이 '거봐라' 표정을 지었다.

혼자 고민하다가 이들에게 도움을 청한 듯하다.

마치 숙제를 떠넘긴 듯 홀가분해 보였다. 트리오 아저씨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나를 엮나?

아무래도 삐딱하게 보게 된다.    

"랜턴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천천히 론세스까지 갈 수 있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만류한다.

"안 돼! 걷는 속도로 봐서 론세스까지 가기 힘들어! 어두워지기 전에 가다가 지칠 거야! "

깐깐해 보이는 아저씨도 '어리석은 녀석'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오리손에 예약이 안 된 걸요."

그러자 로만손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오리손에 가서 알아봐 줄게요."

"예약이 끝났을 걸요?"

그는 '제가 해볼게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동네 유지야?


사실 이 분들이 나를 걱정하는 건 좋은데, 나보고 어쩌란 건가 싶었다. 한국에서 이미 기차 예약을 할 때 생장과 론세스, 수비리 숙소까지 다 예약한 상태였다. 지금은 비수기라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었는데, 한참 준비 중일 때 인터넷 카페에서 방 구하기가 어렵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같은 시기에 떠나는 사람들을 단체 카톡으로 모아 안내를 해주는 고마운 시스템이었다. 인기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 여파일 것이다. 널린 게 한국 사람이라나? 비수기인데도 한국 사람들 때문에 방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니, 다들 지레 겁먹고 나처럼 서너 군데 미리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시간과 거리를 계산 못했다.
지금이 몇 시이고, 몇 킬로 걷는 중인지,
몇 킬로 남았고, 몇 시간 걸릴지!
계산 없이 걷고만 있었다.


꾸준히 언덕을 올라야 한다. 아스팔트 길은 비가 와도 괜찮다.


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조바심 때문인지, 지쳐서인지, 오르막이 가팔라진 것도 아닌데, 배도 고프다.


“그 속도 론세스에 갈 수 없어. 오리손에서 묵어라.”


이번에는 개구쟁이 아저씨 목소리였다. 앞서 걸었던 분들이 어째서 내 뒤에서 나타났을까? 딱히 다른 길로 갈 수도, 어디 들어갈 만한 곳도 없었는데? 구름 타고 다니는 손오공이야? 신령님이야?


"오리손에서 묵도록 해!"


그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치지도 않은 이 권유 뭐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오리손에서 묵는다고 해서 이들에게 무슨 이득이 생기겠는가. 그저 가냘픈 영혼 하나 구제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 중인 듯하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네 번! 따뜻하고 진지한 자세였다.


트리오 아저씨들은 프랑스 코냑에서 왔다. 코냑은 술 이름 아니냐는 내 말에 그들이 껄껄 웃으며 맞다고 했다. 코냑이 지역 이름이라니! 그들의 이름은 로만손, 마마드, 아란이었다. 재미있는 아저씨가 마마드, 깐깐한 아저씨가 아란이었다. 이들은 일터 동료이자 동네 이웃이었다. 누가 봐도 로만손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란과 마마드를 잘 보살피려고 애썼다. 그들은 자신들은 오랜 세월, 좋은 친구라고 했다. 나이를 떠난 우정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언덕을 오르기 전, 숨을 조금 고른다.


깐깐이 아란 아저씨가 무언가를 건넸다.
길가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였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수풀에 열매를 쓰윽 문질러서 자신들도 먹고 내게도 줬다.
배낭에 물이 있지만 아끼기는 분위기였다.


트리오 아저씨들이 근처 바 정도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며  자신들은 조금 쉬었다가 가겠다고 했다. 함께 있던 P선생님에게도 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들만 가버렸다. 엄밀히 말해, 자기 일행들만 간 것이다. P선생님이 갑자기 열심히 올라갔다. 나는 못 따라간다. 일부러 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혼자 걷는 기분이 좋았다. 언덕을 타고 발아래 펼쳐진 풍경들에 행복했다.  온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쉴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경이로운 자연 앞에 신께 감사를 드린다. 자연은 신의 조각품! 지은이에게 절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삶 또한 신의 예술품!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버거움 속에서, 하필 주어진 자유의지 때문에 더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신의 예술품 속에 들어온 또 하나의 예술품이다. 신의 터치는 오늘도 계속된다. 여전히 우리는 그 손길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의지로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힘들고 지친다. 그래서 더 서럽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피레네 산, 발아래 풍경은 근사하다.


산 아래로 보이는 풍광이 참 멋지다. 마음이 열리고 눈이 시원해진다. 우리나라 산은 대체로 경사가 가파르다. 정상에 가야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피레네는 눈 아래 풍광을 끼고 걷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계절 좋고, 맑은 날에는 천연의 하늘색과 푸르른 풀색깔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안개 자욱하고 구름 낀 날에도 위안이 된다. 이따금 안개 사이로 보이는 산간 마을의 풍경이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언젠가 저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한적한 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덜렁 놓여있다. 그곳이 나의 포토존! 나는 훤하게 드러난 풍경을 배경 삼아 한껏 미소를 뿜으려 셀카를 찍었다. 그런데 내 뒤로 로만손과 마마드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거야?

"사진 찍어요?"

"네, 같이 찍어요!"

사람 좋은 미소를 담은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로만손이 웃었다.

"내 여자 친구도 셀피 좋아해요!"

여자 친구?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결혼 제도 속에 들어가지 않고, 동거 형태로 지내나 싶었다.

"수, 오늘 오리손에서 묵을 거죠?"

"아니오. 그냥 론세스로 가야 해요."

"내가 산장에 말해볼게요."

"배낭도 없어요. 잘 중비가 안 되었어요.”

"택시로 배낭을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로만손은 왜 이리 친절을 베풀려 할까? P선생님이 강력히 부탁해서일까? 로만손 일행이 오늘 밤 나를 어째 보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눈빛으로 느껴지는 느낌적인 느낌? 행여 내가 오해할까 싶어서 일부러 여자 친구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가 나서서 내 계획을 뒤흔드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편치만은 않았다. 마음먹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겠다는데! 왜! 굳이! 나를 앉히려는가!


첫날에, 피레네라는 거대 산을 넘는 일, 25킬로라는 그 거리를 오르내리며 가야 한다는 압박감! 지도상 거리보다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힘겨울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안 될 일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지 싶었다. 동키로 배낭을 론세스에 보냈으니, 배낭 때문에 주저앉을 일은 없을 거이고, 물과 간식, 비옷과 랜턴 등 생존 필수품을 넣은 가방도 있겠다. 해볼 만했다.  


차마고도에서도 몇 박 묵은 때도 큰 배낭 대신 작은 배낭에 생존 짐을 꾸렸다. 작은 배낭 무게도 절망적이었다. 비 오는 설산에서 신령처럼 나타난 중국 청년이 내 배낭을 들어주겠다며 앞서 걸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힘겨움으로 기억되었을 산행이었다. 자기 짐만 들고 가도 힘든 산행에, 처음 보는 사람의 짐까지 들어주겠다니! 차마고도는 그 영험한 기운 때문인지, 그는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았고, 전생의 연을 떠올리게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국 남자들은 여자들의 가방을 들어주는 친절을 베푼다는 것! 다른 산을 넘을 때도 또 다른 남자 역시 내 가방을 들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자기 동기생 여인의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내 가방을 들어주느라 그 여인의 가방을 그녀의 애인한테 들려주었다. 그게 그들의 우정 방식이자, 여인에 대한 존중이었다.


드디어 오리손에 도착했다.


오리손 알베르게 앞 데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멋지다.


오리손  알베르게는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의 공간 같다.
우선 오리손에서 점심을 해결해야지 싶었다.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간식에 차 한 잔 마시면 될 것 같았다. 테이블 하나를 이미 로만손 일행이 맡아두었다. P선생님이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점심으로 이미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 파는 따뜻한 음식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들고 온 점심과 차와 맥주를 뒤섞어 먹고 떠날 사람은 얼른 자리를 털고 갔다. 점심부터 거하게 식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남을 사람들은 이곳에 묵을 사람들이다. 배낭을 이곳에 보낸 사람들도 있고, 메고 온 사람들도 있다. 생장에서 이곳까지는 8킬로 정도였다. 배낭을 메고 온 사람 중에도 다음 날 론세스까지는 동키를 보내기도 한다. 그만큼 더 길고 힘든 구간이기에! 관리자가 예약을 확인하면 차례로 침대를 배정해준다. 그 시간 동안 레스토랑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예약을 한 사람들은 숙소에서 저녁과 아침까지 먹을 수 있다. 모두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시간도 주어진다. 짧은 시간에 알게 된 이 친구들이 앞으로 길 끝까지 함께 할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오리손은 밤하늘 별을 보기 좋은 곳이란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별 보기 힘들겠지만!


내가 여전히 머물겠다고 하지 않자, 로만손이 나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정말 가려고요? 위험한데? 내가 주인장한테 물어봐 줄게요!”

뭘 물어봐준다는 걸까? 그가 카운터에 가서 뭔가를 묻더니 걱정스럽게 돌아봤다.

“여기서 5시간이 더 걸린대요. 당신 그 시간에도 못 가요. 지금보다 더 오르막이라 힘들대요. 날씨도 안 좋은데, 곧 해가 지면 어둠이 올 거야.”

“빨리 걸으면 되잖아요. 나 랜턴도 있고 비옷도 있어요!”

그는 카운터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피레네를 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돌풍이 삼키거나 금지된 시기에 험한 코스로 가거나, 체력을 조절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일 것이다. 나는 그런 위험을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차마고도에 대한 부심도 있었다. 남보다 조금 느려도 도착은 할 거라는 확신!

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아는지 P선생님이 대놓고 졸랐다.


"로만손 일행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몰라요. 올라오는 내내 오리손에 묵게 해야 한다고 얼마나 야단이었는데요."
나 모르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로만손과 p선생님, 그리고 한 발짝 떨어졌지만 신경은 쓰고 있는 마마드와 아란 아저씨! 이들이 굳이 나에게 이러는 이유를 잠깐 생각해봤다. 뭔가를 알고 있다. 뭔가를! 내가 이대로 가면 안 되는 뭔가를 알고 있어! 내가 뭐라고 이렇게들 할까. 이제 그만 깨끗이 포기해야지?


"침대는 있대요?"


로만손이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관리자에게 묻는다.

"있대요. 우리랑 건물은 다른데, 신축 건물이라 깨끗하대요."

예약 없이도 가능한 거였나? 나중에 듣기로, 오리손은 환자나 노인들을 위해서 예약에 조금 여유를 둔단다. 성수기 때는 그것도 아예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극성수기가 아니니 가능했던 것 같다. 여하튼 로만손은 사정 반, 정중 반 섞은 부탁으로 내 자리를 빼주었다. 내가 뭐라고, 얼마나 봤다고 마음을 낼까? 그는 누군가를 도와야만 날개를 유지하는 천사인가?


내가 이런저런 고민으로 결정을 못하자 로만손은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P선생님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세면도구 좀 빌려 쓰겠습니다."

내가 하루 묵겠다고 하자, 로만손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내 야기를 전달했고, 그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로만손은 나를 불러 밖으로 나가자 했다. 누가 보면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다.

"예약한 곳을 알려줘요. 내가 전화해서 약속을 미룰게요."

사실 예약금을 날려 먹을 생각으로 오리손에서 자겠다고 한 거였다. 그런데 로만손이 나서서 예약을 하루씩 미루겠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요? 예약이 다 찼을 텐데요."

"내 생각에는 가능해요. 내가 직접 말해볼 게요."

"론세스와 수비리, 두 군데 다 미뤄야 해요."

"둘 다 미루면 되죠. 나는 영어는 물론 스페인 말도 할 줄 알아요. 물론 나의 나라 프랑스 말도 할 줄 알죠. 하하하!"

부럽다, 이 농담! 모국어까지 핵심 언어를 섭력했군!


오리손 바로 앞 테이불은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도 쉼을 준다.


로만손이 나무 테이블에 편하게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어른들 앞이라 담배를 못 피워서 지금 한 서린 뻐끔이를 하는 것인가? 나를 돕겠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담배 연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프린트해간 숙소 연락처를 내밀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경우를 대비해 아날로그적으로 준비했다. 론세스바예스와 그다음 코스인 수비리까지 예약된 상황이었다. 그가 전화를 걸다가 연결이 안 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경이 달라지면서 뭔가 달리진 건지, 자기 전화가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설마 전화비 아끼려고 쑈를 하겠어? 내 전화기를 건넸다. 어차피 유심으로 유럽 내 전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아직 사용을 못해서 전화 거는 방법도 궁금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통화가 됐다. 그는 유창한 말로 숙소 예약을 미루었다.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순간, 반할 뻔했다. 천사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자, 이제 숙제가 끝났어요. 마음 편히 쉬도록 해요."

누구의 숙제였나? 그는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홀가분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션을 끝낸 것 같았다.


순례를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 성자들이 현현해 사람들을 돕고 사라지는 일, 그런 일이 거짓말처럼 벌어진다. 나는 로만손이 나를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뭐가 됐든 내가 아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그대로 가면 안 된다고 했다. P선생님의 염려가 다는 아닌 듯했다. 오늘 내가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다가 위험을 당할 것을 마치 정해진 일인 것처럼 말했다. 정말 그랬을까? 더군다나 그는 나의 고집을 꺾는 방법도 알았다.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건 마치, 오빠 믿지? 수준이었다. 그대가 누구시든 믿겠어요. 그리고 감사해요. 당신은 아무래도 신이 보내주신 나의 수호천사인 듯합니다. 다음 날, 내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던 이유였다.


오리손 알베르게 레스토랑은 점심시간에도 순례자들로  빼곡하다.


관리자가 숙소를 지정해주는 때를 기다리며 우린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미리 싸온 샌드위치를 꺼내서 코냑 대신, 코냑 남자들이 건넨 바게트에 치즈와 하몽을 얹었다. 나는 로만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맥주 한잔을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부담스러웠다. 다음 코스에서 그들을 만난다면 뭐라도 사겠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다니!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즉시 갚으려는 습성이 있다. 이따금 그런 방식이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는 섭섭함으로 작용했다. 받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 나를 도우려는 그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 왜곡하기도 한다. 사실 나 또한 누군가를 도울 때 뭔가를 뽑아 먹어야지 하며 돕는 건 아닌데 말이다. 이따금 남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해 뒷말을 하거나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을 봤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손해 보는 게 낫지, 뭔가 도움 좀 얻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욕먹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도움을 받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부탁도 잘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맥주를 마시라고 하자, 로만손은 계속 마다했다. P선생님은 자신도 사양하면서 로만손에게는 마시라고 거들었다. 로만손은 마지못해 커피 한잔이면 된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어딜 가나 커피는 제일 싸다. 마마드와 아란에게도 맥주를 마시라고 하자, 아란은 커피, 마마드는 맥주를 시켰다. 로만손이 보기에 마마드가 눈치 없어 보였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가 산다는 걸 몰라서 그런 듯하다. 로만손에게 내가 눈치를 주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오리손에서 묵게 되었다.


저녁 먹을 때 다시 보기로 했다. 각자 배정된 곳으로 갔다. 나는 맞은편에 있는 새로 건축한 건물로 갔다. 산이 보이는 배경이 훌륭했다. 건출 내부도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하고 넓었다. 바닥은 모두 대리석이었다. 모든 인테리어가 다 깔끔했다. 이건 특혜에 가까운 버전이었다. 나중에 세면도구를 빌리러 갔을 때, 기존 건축물이 얼마나 낡았는지, 여러 좁은 방으로 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P선생님은 이제 막 샤워를 끝내고 뒤뜰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해가 나지 않는 날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해가 지면 햇빛으로 말릴 수는 없었다. 그저 바람에게 기댈 뿐! 기능성 옷들은 그렇게도 마르니 말이다.



오리손 알베르게 신축 건물 안, 방문이 참 예쁘다.


오리손 알베르게 신축 건물 내부는 정말 깨끗하다.


오리손 알베르게 신축 건물 안, 전경이 아름답다.


나는 세면도구를 들고 다시 신축건물로 돌아왔다. 이제 긴장의 시간! 샤워 따위 하는데 무슨 긴장? 오리손에서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이른바 5분 샤워 코스! 코인을 넣으면 딱 5분간 물이 나온다. 그 짧은 시간에 샤워를 할 수 있느냐? 초조하고 난감한 순간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샤워 부스 쪽에서 서로 물어보고, 도와주고, 그런 과정들을 거쳤다.


샤워를 하기 전, 준비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일단 화장실 안에 있는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샤워실 내부에 중문이 하나 있다. 코인 박스가 놓이고 옷을 벗어 걸어둘 수 있는 공간, 이제 문 하나를 더 열고 들어가면 본격적인 샤워기가 눈앞에 놓인다. 얼떨결에 코인박스에 코인부터 넣으면 안 된다. 그때부터 카운팅이 되니까, 옷을 벗는데 시간이 다 간다. 절대적으로 나체인 상태로 코인 박스에 접근해야 한다. 코인을 넣는 동시에 안쪽 문을 열고 샤워기 앞으로 가서 샴푸질과 비누칠을 동시에 시작! 이럴 때 올인원 샴푸가 빛을 발한다.

코인 박스에 돈 넣은 과정도 쉽지 않다. 머리 위쪽에 있어서 코인이 잘 꽂히지 않는다. 이래저래 애를 먹은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다며 문을 열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워워, 이때 참아줘야 한다. 샤워실 바깥문을 열면 바로 화장실이 있는 세면대! 바깥사람들은 옷을 입고 있다. 당신의 알몸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제 준비가 다 됐으면
심호흡을 하고
샤워를 시작하면 된다.
허둥거리지 말고, 그저 빛의 속도로 샴푸질과 비누질을 대충 하고, 헹구는데 시간을 많이 둬야 한다.
여기서 속옷 따위를 빤다고 그 아까운 시간을 버리지 말 것! 속옷은 바깥 세면대에서 얼마든지 여유 있게 빨 수 있다. 다만 말릴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미친 스피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워를 끝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의지가 행동을 일군 것이다. 때를 박박 미는 것이 아니라면 5분은 샤워하기에 터무니없는 시간은 아니다. 머리가 긴 여성은 시간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헹구는 수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5분 샤워는 산장에서 물을 아끼려는 멋진 고안 책이다. 샤워 물줄기를 내 의지로 잠그는 여유 있는 몸짓으로, 몸을 닦고 옷까지 다 갈아입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옆 칸에서 코인 넣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문을 현관문 안전장치만큼 열었다. 아마도 옷을 다 벗고 코인을 넣으려다가 낭패한 것이리라. 나 역시 관찰 끝에 얻은 결과를 공유할 차례! 그녀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뿌듯하게 나왔다.


오리손 전경은 아름답다.


오후 늦게서야 날이 갰다. 저녁 시간까지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거나 데크 근처를 배회했다. 이곳은 구경할 만 마을도 없다. 오롯이 산장 하나 있는 산중이다. 특별하 산책할 필요도 없다. 오늘 애써서 왔던 길과 내일 힘겹게 갈 길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첫날의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풀 요량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리손 알베르게 앞 데크에서 쉬기만 해도 좋다.


레스토랑에서 차 한 잔을 주문했다. 데크에서 쉬면서 드넓게 펼쳐진 산맥도 찍었다. 한두 장 찍으면 그게 다다. 나를 넣은 셀카도 잊지 않았다. 데크에 놓인 테이블과 찻잔, 그 차를 마시는 나를 하나 더 찍었다. 맞은편 테이블이 비었기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셀프타이머를 누르려던 순간, 한국 처자들이 다가왔다. 아까 올라올 때 인사는 나눴던 처자들인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사진을 찍어주겠다기에 고마운 마음에 포즈를 취했다. 두 사람도 같이 찍어주겠다고 하자, 아니라고 한다. 굳이 둘이 찍을 필요가 없다는 말? 아마도 오면서 지금 막 만난 사이인 듯했다. 그렇더라도 기념으로 찍으면 좋으련만! 요즘 친구들은 마지못해 하는 게 없나 보다. 관계들도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쪽에 충전하는 함이 있다. 충전 동안 열쇠로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 일회용 침대보는 떠날 때 아래 바구니에 넣는다.


다시 숙소로 내려가서 침대 커버도 입히고, 배낭도 사물함에 넣고, 충전도 시켰다.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다. 별다른 할 일 없이 이 시간만 기다렸다.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아직 많지 않았다. 로만손 알행은 보이지 않았다. 벽난로 쪽으로 가서 자리를 맡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오고 내 옆자리에도 사람들이 앉았다. 이제 다섯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앞자리에도 누군가 앉았다. 일행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주홍 불빛 아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테이블이 크게 두 줄로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줄은 내 또래 여자들이 많이 앉았고, 옆 줄에는 남자들이 앉았다. 이상하게 남녀가 갈리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 내가 자리 있다고 버티다가 아저씨들이 앉으면 눈총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 이거 뭐지 싶었다. 충분히 자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양쪽 줄 자리가 모두 채워져 갔다. 코너 세 자리만 남은 상태였다.



오리손 레스토랑은 내부 불빛이 은은한 주홍색이다. 예술 작품도 많다.


말 없는 아저씨 하나가 와서 모서리 쪽 자리에 앉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채워지는 중에도 로만손 일행과 P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되면 에라 모르겠다였다. 그 뒤로 P선생님과 아란 아저씨가 뒤늦게 와서 앉았다. 이제 이곳엔 자리가 없다. 뒤늦게 등장한 마마드 아저씨가 내쪽으로 왔다. 자리가 없자, 말없는 아저씨를 보더니 일어나라고 했다. 우리 일행 자리라며! 깐깐한 아란 아저씨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얘가 뭐 하는 거지?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만류했다. 자기들끼리 프랑스 말로 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 뭐 하냐? 이 사람한테 왜 일어나라고 해? 네가 꾸물거리다가 늦게 왔잖아! 어차피 로만손도 앉을자리 없어. 저쪽으로 가서 대충 끼어 앉아."

"어디? 자리가 없는데?"

"중간에 빈자리 한 두 개 있잖아. 거기 가! 늦게 와서 뭔 불만이야!"


이거 못 알아 들어도 왜 알아듣지? 아란 아저씨는 내가 자리를 맡아서 자기가 편하게 앉았다는 듯 유순한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사실 나랑 제일 말도 안 하고 친절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내 옆자리에 앉은 것이 이 분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말 없는 아저씨는 정말 말이 없었다. 묵묵한 성격인 것도 같았지만 어쩐지 사연이 있어 보였다.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툭 건들면 눈물이 쏘아질 것만 같았다. 마마드 아저씨는 유쾌한 개구장이인데, 왜 그랬을까? 아까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이후 더 거나하게 마셨나? 왜 말 없는 아저씨한테 함부로 대한 것인가? 그에게 술주정이 있나? 로만손이 그래서 그가 맥주 마시는 걸 꺼려한 건가? 그 와중에도 말 없는 아저씨는 별다른 대꾸도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만 있었다.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혼자인 듯했다.


로만손이 뒤늦게 나타났다. 그도 우리 쪽으로 왔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쪽 줄로 갔다. 그는 모서리 쪽에 앉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만 지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스타일이네? 그 적극적인 모습은 어딜 가고 부끄러워하다니! 안 어울려! 마마드 아저씨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더니, 옆 사람이 말을 걸자 방긋 웃으며 대꾸하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애쓰는 모습이었다. 내게 왜 자리를 맡지 않았냐는 표정을 던졌다. 나무라는 게 아니라, 아쉬움이었다.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왜 그랬니? 하는 메시지였다. 나는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할 뿐이었다.


P선생님도 로만손 일행들과 있으니, 조금 진정되어 보였다. 사람이 없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나? 내가 오리손에 묵을게 된 것도 어쩌면 P선생님의 염려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아까 사진 찍어준 처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오후 늦게 이곳에 있었으니, 묵고 가는 걸 텐데, 식사를 신청하지 않은 모양이다. 두 끼 식사가 비싸지 않아서 대부분 신청하지만 원하지 않으면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는 식사비는 내지 않고 숙박비만 내면 된다. 다만 숙소에는 부엌이 별도로 없어서 음식을 해 먹을 수는 없다.


사람은 다 똑같았다.
낯선 사람들은 불편한 것이다.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오는 내내 친절을 베풀던 그들이었지만,
내 친구라는 말하지 못한 것이다.



식사가 나올 때마다 행복했다. 풍성하고 맛있는 식사로 대화가 오갔다.


주홍 불빛이 가득한 산장은 아늑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소개 시간을 갖겠다고 산장 관리자가 말했다. 그는 유쾌하고 성실한 사람 같았다. 대부분 짤막하게 자기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더러 길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벼운 농담이지 그다지 깊은 얘기는 아니었다. 소개가 끝나면서 길게 늘어선 테이블에 개인 접시가 놓였다. 오늘의 식사가 이어져 나왔다. 테이블 당, 큰 그릇으로 음식이 놓이고, 각자 작은 접시로 덜어먹는 형식이었다. 수프와 함께 차례로 닭고기 튀김과 후식이 나왔다. 훌륭한 식사였다. 역시 와인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해서 건배 용으로 썼다.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혔다. 그 모습이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성들은 부부이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들뜨지 않았다. 어디에도 로맨스도 물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낯설기만 한 사람들, 과연 이들과 길 위에서 만나면 반가워하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날이 흐려서 아름답다는 별들의 공연울 볼 수 없었다. 원래 걸으려던 거리의 반도 못 미치는 거리였는데, 첫날 피레네는 나에게 버거웠다. 나는 저녁을 만족스럽게 먹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모두 그런 듯했다. 순례자들에게 쉼을 주는 오리손 알베르게에서 나는 순례길 첫날을 묵었다.



어둠 속에서도 오리손 알베르게는 빛이 되어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 나는 고요를 택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