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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Sep 12.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수비리? 주비리? 유빌립?

[3일] #1.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Zubiri)

앗! 이럴 수가! 늦었다.

일찍 나서겠다고 아침식사도 신청 안 했는데, 이리 늦게 일어나다니!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봉사자가 벌써 왔다. 여태 자는 인간 있나 살피러! 그러니까, 그리 큰 숙소에 나 포함해 두 명만 남았다. 한 사람은 봉사자와 얘기를 나누느라 남은 듯했다. 결국 나만 늦잠 잔 것이다. 누가 왜 안 깨워줬냐고? 누가 깨워주나? 순례길은 철저히 자기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함께 움직이는 일행들이 아닌 이상 타인을 간섭할 수 없었다. 행여 내가 아침식사를 신청했다면 메디가 나를 깨워서 아침 먹으러 가자고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침을 안 먹겠다고 했으니, 잠자는 사람을 굳이 깨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순례자의 아침은 누구에게나 바쁘다. 남을 살필 겨를이 없다. 지금 시간에는 모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떠났을 것이다. 한국 청년도 새벽에 출발한다고 했다. 어차피 각자 떠나는 것이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전경


식당을 지날 때 보니,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례자들도 더러 있었다. 후회했다. 아침식사를 신청하고 든든히 먹고 출발했어야 했는데! 뭐? 아침에 일찍 나서려고 아침을 안 먹어?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릴까? 커피에 오믈렛이라도 먹으려면 서둘러 가야 했다. 마을에 도착한다고 해결되는 갓도 아니었다. 카페가 문을 열지 않으면 못 먹는 것이다. 마음 잡고 부지런히 걷자 싶을 때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를 부른다. 자기들 사진 좀 찍어달란다. 건물 전체가 나오게 단체 컷으로!


그들이 원하는 각도로 찍어줬다. 만족하더니만, 나도 찍어준단다. 나는 딱히 욕심나는 배경은 아니었지만 고맙다며 휴대폰을 건넸다. 그때 도로 건너편에서 신부님이 이쪽으로 서둘러 ㄱ건너온다. 아까부터 건물 앞에 세워둔 차에 뭔가를 실어 나르면서 바쁜 모습이었는데! 신부님은 정말 반가운 얼굴로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들과 아는 사이인가 싶었다. 그런데 신부님이 나까지 차별 없는 반가움으로 대한다. 마치 순례자는 같은 형제라는 듯! 곧이어 축복 기도를 해주시겠단다. 오! 이런 행운이? 어제 미사를 안 드려서 아쉬웠는데, 축복 기도를 받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이 청년들이 진작부터 신부님께 축복기도를 부탁드리고 기다린 게 아닌가 싶었다.


신부님이 급한 와중에도
축복 기도를 해주고 가셨다.
나는 얼떨결에 지나가다가 
행운을 얻었다.
일단 받고 보는 축복기도!
든든했다.  




얼마간 오솔길을 걸었다. 아침 숲길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한가로운 오솔길을 슬슬 걷다 보니, 어느새 동네 집들이 보인다. 그리고 만난 화려한 벽! 각 나라별 '반갑다 환영한다' 인사말이 적혀있었다.

길 건너편에 슈퍼마켓이 있었다. 앞에 놓인 의자에 배낭을 놓고서 슈퍼에서 산 물건을 넣고 있는 순례자들! 나도 얼른 들어가 사과 한 알, 복숭아 한 알, 초콜릿 쿠키와 음료수를 쥐었다. 주인장은 적은 양을 골라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순례자들이 무게 때문에 최소량을 사는 것에 익숙한 듯했다.  


마을 벽에 새겨진 각 나라 인사말! 내가 눈이 안 좋은 건가? 우리나라 인사말이 안 보인다.


작은 슈퍼마켓이지만 필요한 물건은 거의 다 있다. 순례자들을 위해 소량도 기꺼이 계산해준다. 복숭아 한 알이라도!


마을은 붉은 기와를 얹은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집들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 이게 바로 유럽 마을들의 목가적 풍경! 힘겨운 피레네를 넘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그나마 평평한 곳을 가게 된다. 일부 구간은 내리막이라 조심해야 한다. 피레네처럼 급경사는 아니라니, 신경만 조금 쓰면 될 것이다.


마을들이 참 예쁘다. 차도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주의해 걸어야 한다. 인도가 거의 없는데, 있어도 좁다.


마을 어디에나 성당과 공터로 된 쉼터들이 순례자들을 반긴다.




나무다리가 놓인 작은 냇가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한 커플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부엔 카미노!”

"아, 부엔 까미노!"

순례자들끼리 반갑게 인사 나누는 일이 이제 익숙하다. 내가 헤벌쭉 웃으며 비켜서자, 커플 중 여인이 내게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혼자라 신경 써주는 건가 싶었다. 굳이 남에게 부탁해서 찍을 만한 뷰는 아니었다. 그저 경유지를 기억하기 위해 찍는 경우도 많았으니! 나는 괜찮다고 했다. 커플의 걸음을 굳이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중년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친절한 미소로 말했다.

"찍어줄게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계속 찍어준단다. 뭐지? 이 과잉 친절은? 아무래도 내가 혼자 사진 찍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사실 혼자 찍는 사진은 배경 반, 얼굴 반이다. 배경마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등장한다. 전신 샷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순례자 모습으로 넓은 배경과 함께 찍히면 근사하지 않은가? 와이드 한 나무다리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그녀는 이미 다리를 건넌 남자에게는 멀찍이 떨어져 서있게 하고, 자기는 남아서 나를 찍고 건너겠다고 했다. 아, 부담스러워! 뭘 이렇게까지! 일단 싱긋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리를 건너오라고 했다. 내가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둘을 넓은 배경으로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됐다고 한다.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듯! 사진을 보니, 괜찮다. 보통 서양 사람들은 배경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찍는다. 얼굴은 크게, 배경은 그야말로 배경으로만 쓴다. 그래서 나는 배경을 근사하게 넣고 싶으면 동양권 사람들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그들은 다리가 짧든 길든, 전신을 담아서 찍으려고 한다. 심지어 오르막에서 내리꽂아 숏다리 모드로 찍더라도 몸을 다 넣어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사진은 서양 사람 마인드와 달리 배경을 넓게 넣고, 사람을 콧구멍만 작게 찍었다. 잘 찍었다. 생각보다 흡족한 사진이 나왔다. 고마운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곳이라 여겼는데, 사진을 찍고 보니, 화살표와 어우러진 나무다리가 멋지다.


얼마간 걷다 보니, 한가로운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익숙한 얼굴! 메디가 아닌가? 메디가 나타났다. 아침식사를 한 그녀의 모습은 밝았다. 진작부터 웃고 있던 그녀! 나는 대뜸 물었다.

“아침식사, 맛있었어?”

“그럼, 훌륭했어. 당신도 먹었어야 했는데! 우리 같이 사진 찍자!”

밑도 끝도 없는 사진 찍기! 오늘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제 보니, 그녀도 나처럼 사진 찍기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브라질 친구 마기랑도 처음 봤는데, 서로 사진 찍어주며 신나게 웃었던 것 같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고픈 사람의 표정이라고 설명하자 그녀가 깔깔깔 웃어댔다. 너무 재미있다는 듯 한참 동안 웃음을 머금은 채 지긋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은빛머리가 정말 세련되어 보였다. 이게 흰머리가 아니라, 은빛으로 염색한 머리 같기도 했다 

“메디, 모델이야? 왜 예뻐?”

그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래?”

딱히 놀라거나 황송해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아봤지? 하는 표정이 스쳤다. 살짝 비슷하다는 식으로 시익 웃었다. 앞으로 도착할 곳에서 알려주겠단다. 자신은 먼저 빠르게 걸을 것이고, 빰쁠로나 대도시에서 만나자고 했다. 중간에 차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나? 여하튼 이틀 후에 보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본격적인 순례다의 모습은 아니었다. 스판기 있는 딱 붙는 청바지에 가벼운 패팅 차림이었다. 배낭도 없었다. 가벼운 섹 하나 멨다. 미스터리 여인! 어쨌든 내 현지 연락처를 묻고, 왓츠앱으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그녀는 떠났다. 메디는 이제 나와 친구가 되었다는 듯 이후에 계속 메신저로 소식을 알려왔다. 내가 유심과 데이터 사정으로 바로바로 답장을 못해도 그녀는 꾸준히 사진과 소식을 전하며 내 안부를 물어왔다. 메디는 따뜻한 사람인 듯했다.





아침을 슈퍼에서 산 주스와 쿠키로 때웠더니, 몸이 조금 서늘했다. 따뜻한 커피가 절실했다. 여태껏 걸어도 커피 마실 만한 카페나 바가 나타나지 않았다. 숲길 한가운데로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혼자 넓은 길 한가운데를 느리게 걸어도 누구 하나 뭐라 그럴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 사람들! 짧은 구간만 걷는 관광객들인 듯했다. 가방도 가벼워 보였다. 버스가 일정 구간에서 내려주고, 얼마간 걷다가 일정 구간에서 다시 실어가는 형태, 점심은 정해진 구간에서 준비해서 먹는 투어 개념이었다. 시끄러웠다.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웠다. 우리나라 아주머니들 흉볼 게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누가 유럽 사람들이 매너가 좋다고 했는가?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 유럽 사람들에 대한 환상을 누가 심어주었을까? 어디에서나 일정한 무리들이 포진해 있다는 게 신비로울 뿐이다. 내가 빨리 가서 이들에게 벗어나든가, 그들이 어서 빨리 나를 스쳐 지나가든가. 제발, 내 뒤 20여 미터를 쫒아오면서 계속 떠들지 말기를!


내가 템보를 늦춰 걸으니 그들과 겹쳐졌다. 일단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쏟아지는 순례자 질문! 이름이 뭐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언제 시작했어? 어디에서 시작했어? 그런 질문들을 던질 때 다 받아냈다. 야구공이 펑펑 날아올 때마다 팅팅 하고 받아내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객을 대하는 판매왕 같은 미소로 응대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형과 형수와 여행을 다니지만 자신은 혼자라고 했다. 안 궁금한데도 걸음 속도 때문에 계속 겹치다 보니,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 나오는 정보들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는 통에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순례자와 관광객은 아무래도 마인드가 다르긴 했다. 고요를 못 참는 그들 때문에 내 마음도 고요하지 못했다. 다행히 길 끝에서 그들과는 갈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을 태우는 버스와 만나는 지점인 듯했다. 모처럼 떠들썩하게 가족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왠지 모를 부러움 같은 게 스쳤다.


가족과 여행을 한다는 건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나는 왜 혼자 이렇게 걷고 있을까.
아직은 많은 생각을 말자!
오늘 갈 길만 일단 가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쭉 내리막이다. 아스팔트는 걷기는 편하지만 흙길보다 무릎에 무리가 간다는 사람도 있다.




어느 마을로 들어섰을 때였다. 마을이 정말 예뻤다. 나무문 옆에 꽃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고, 위층 창문 베란다에도 꽃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이런 고즈넉한 마을에서 살면 참 좋을 듯했다. 그냥 관광이 아니라 여기에 산다면 이웃들과 한가롭게 소몰이를 하며 빵도 구우면서 살겠지? 지금처럼 농촌이 쇠락한 형태가 아닌, 우리 예전 시골처럼 어린이부터 청년, 장년, 노년들이 다 모여 사는 구조! 현대식으로 지어진 예쁜 집에 마당과 텃밭이 있고, 큰 하늘과 땅을 품으며, 발달된 문명이 한껏 들어와 있는 농촌 마을! 발달된 병원과 학교가 있어서 누구나 혜택을 보며 살 수 있는 곳, 마을 단위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 개방적이고 흥겨운 삶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밭과 마을 도로 사이에 놓인 낮은 담장에 앉았다. 하늘 한 번 보고, 예쁜 집들 보고,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도 부르면서 여기저기 사진도 찍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발이었다. 피레네를 넘어오며 마기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친구! 오늘은 마기 대신 다른 여인이 곁에 있었다. 그녀도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배낭에서 옷을 꺼내느라 짐을 다시 꾸리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사진 찍어달라고 했던 일! 아, 창피한 그때인데! 그녀가 나를 눈치 없는 사람으로 기억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발이 옛 친구나 되듯 나를 반가워하니, 그녀도 환한 미소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린 서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서로 알아요.”  


그녀의 이름은 '안'이었다. 외국 친구들이 풀네임을 말할 때 나는 아예 부르기 쉬운 이름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럼 적당한 이름을 알려준다. 발도 그런 경우이다. 내 이름도 그렇게 알려줬다. 그들도 한국식 풀네임을 어려워한다. 우리야 두 글자 이름이 쉬운데, 외국 친구들은 놀라워한다. 온 국민이라 어떻게 두 글자로 이름을 다 짓냐는 것이다. 물론 외자도 있지만! 대부분 말이다. 생각해보면 두 글자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짓는다는 건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바뀐 글자가 그들에게는 헷갈릴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발음하기 쉬운 글자 하나로 이름을 알려준다. 한국식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우니!


발이 내게도 함께 걸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좀 더 쉬었다 가겠노라 했다. 발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졌다. 순례하는 동안 서로 소식을 알리면서 가자고 했다. 젊은 친구들과 달리, 우리 또래부터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긴 듯했다. 그녀는 이곳을 많이 와 봤다고 했다. 나는 걸음이 느린 편이라 못 쫓아갈 듯했지만 그녀와 연락처를 나누었다. 나중에 단체 톡을 만들어서 초대하겠단다. 적극적인 모습이 리더 기질이다.  

 

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을 풍경이지만, 초반 피레네를 넘어와서 보는 마을 풍경은 정말 아름답게 다가웠다.


그녀들이 가고 얼마 뒤, 아까 론세스바예스 정문에서 봤던 청년 무리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내가 마을 유지도 아닌데, 왜 여기서 순례자들을 다 맞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 한 명과 남성 세 명인 그들은 피부톤이 인도나 아랍계 같았다. 여성은 유럽계였다. 그들이 아까 자신들의 이름과 나라를 말해줬는데, 걸어오면서 혼이 날아간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또 물어보기 뭐해서 '다 안다' 표정으로만 대화를 나눴다. 그들과 오늘 일정만 나누고 역시 먼저 가라며 정중히 그들을 앞세웠다. 어제 삐끗한 발 때문에 서둘러 가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보다 별 탈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소염제도 먹고,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 순례가 계속되려면 나 스스로 신경을 써야 했다.

 



날이 맑았다. 바람이 선선했다. 약간의 오르막 숲길에 다다랐을 때였다. 신선한 충격! 래시영화에 나온 주인공 같은 개가 내 뒤에 있다가 쪼르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등에는 주황색 배낭을 메고,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까지 달고서! 나는 너무 놀라서 주변을 돌아봤다. 주인인 듯한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세상에! 이 개도 순례길을 함께 걷는 건가요?"

"네, 생장에서부터 저랑 쭉 걸어왔어요!"

녀석이 사람도 넘기 힘든 피레네를 넘은 것이다.

"어디까지 갈 건데요?"

"모르겠어요. 저 친구가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려고요."


인간에게도 고단한 길을 저 녀석의 보폭으로 너무 멀고 고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주인이 먼저 하지 않았겠는가? 아직 순례길 초입이라서 녀석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나는 녀석이 고마웠다. 순례자들에게 힘을 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짧은 다리로 총총총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녀석이 아프지 말고, 온전히 이 순례길을 잘 걸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때 녀석이 나를 휙 돌아보다가 다시 걷는다. 마치, 나는 문제없어. 너나 신경 써라, 하는 눈빛? 알았다. 나도 신경 쓰마! 우리 모두 파이팅하자!


예쁜 녀석들이 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주인과 함께 순례길을 걷는다. 개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배낭들이 있다니, 놀라웠다.


내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자, 주인장이 개를 세운다. 그때도 주인장만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 내게도 저런 녀석이 있었지!


산길을 가다가 다시 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발바닥이 아프다. 식수도 있는 곳이라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아까 슈퍼에서 산 간식도 먹고 갈 참이었다. 강당처럼 보이는 지붕 있는 건물 앞에 앉았다. 마을 사람들이 체육관으로 쓰는 곳 같았다. 운동기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한쪽에 있었다.


천도복숭아를 물에 씻어 배낭을 내려둔 곳에 가서 앉았다. 양말까지 다 벗어서 햇볕 쏟아지는 자리에 말렸다. 어디서 고양이가 나타나서 내 옆에 탁 앉는다. 마치 내가 주인이라는 듯 거리낌이 없었다. 뭐냐, 이 자연스러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자, 또 다른 녀석이 다가와서 내 앞에 앉는다. 딱히 간식을 달라는 애절한 눈빛도 아니었다. 심심했는데, 생명체가 출현하자 구경 나온 것 같았다. 마녀 곁에 왜 그리 많은 고양이들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심심하니까! 심심하다. 유럽 시골은 정말 한적해서 심심하다. 그래서 서로 말벗하며 의지하지 않았을까?


과일이 싸고 맛있다. 납작 복숭아가 맛있단다. 내 시기에는 거의 없었다.
오자마자 내 곁에 붙어있다. 얼굴을 들여다보지고 않고, 내가 자기 주인인 듯 익숙한 모습이다. 뒤에 다음 타자도 기다리고 있다.


고양이 녀석들이 오래전 알고 있었다는 듯 나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이, 나 몰라? 너, 몰라보게 동양적으로 변했다. 자연스러운 눈빛은 간식을 떼어줘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혼자 낄낄 거리며 웃었다. 전생에 진짜 마녀로 몰려서 죽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때 나의 처절한 죽음을 보고 고양이는 말했겠지. 죽음, 그거 별 거 아니야. 언제든 다시 와,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나는 소원을 빌었을지 모른다.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유럽에 태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그런 때에 태어나게 하소서! 부디, 그곳에서 당신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랬을까.


나는 이곳에서 슬픈 최후를 맞이했던 적이 있었을까? 마녀사냥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몸서리치는 저주를 뿜었을까? 그래서 지금의 인생에서 그 저주의 부메랑을 받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가 됐든, 잘 살고 싶다. 재미있게! 행복하게! 능력껏 일도 하고, 연애도 멋지게 하면서!


스틱 끝에 왜  앉아있는지, 등산화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기도 했다. 등 돌리고 한참 저러고 있을 때는 경호원 같았다. 나를 지켜주려는 듯!


너무 심심한 표정이다. 간식을 주자 처음에는 쳐다도 안 보더니, 먹어주는 시늉을 했다. 불청객의 습격으로 그 마저 다 먹지 못했지만!


고양이에게 간식을 다시 건네자 못 이긴 척하고 받아먹는다. 그때 어디선가 다다다다 소리가 났다. 개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 와르르 달려오는 개를 피해 고양이들이 죽어라 도망간다. 순식간이다. 일망타진의 기쁨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의 눈빛이 어찌 저리 순진한가. 저런 파워풀한 내침에는 사나운 눈빛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전혀! 너무 귀엽다. 숨이 찼는지, 식수통에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내가 녀석에게 간식을 던져주자 냄새를 킁킁 맡더니, 그냥 가버렸다. 아니, 왜 과자를 안 먹어? 왜 간식에 관심이 없을까? 순례자들이 하도 많아서 이골이 난 것인가? 너무 순하고 예쁜 녀석들이었다.


듣기로는 이곳이 동물들이 물을 먹는 곳이란다. 사람이 먹는 물은 이쪽 구석에 별도 식수터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니 돗자리를 펴고 앉은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등산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모두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마음 편히 햇빛을 쬐며 간식까지 먹고 있으니 속 편해 보였나 보다. 아직 갈길이 구만리인데, 너무 퍼져있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할 테지만, 이미 수비리까지 예약을 마친 상태였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비수기로 접어드는 시기라지만 한국 단체 관광객 소식에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수비리 공립 알베르게가 공사 때문에 문을 닫아서 더 전쟁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 예약을 마쳐도,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좋은 자리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작은 마을에는 보도블록이 없다. 마을을 관통하는 차도 곁을 조심스레 걸어야 했다. 차가 많지 않아서 그럭저럭 다닐만했지만, 이따금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 하고 달리는 차들로 몸을 벽 쪽에 바짝 붙여서 걸어야 했다. 어쨌든 차로 인한 사고 소식들이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도로에 있는 집들은 문 앞에 배수로들이 있기도 하다. 그로 인해 양쪽으로 발을 벌리고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문만 열면 바로 차도가 있지만 문 앞에 꽃이 담긴 화분들을 놓고, 앉을자리들도 마련되어 있다. 물 마실 수 있는 수도도 있다. 그래서 작은 도로 앞 집들도 동화 속 집처럼 예뻐 보였다. 작아도 집은 온전히 집다운 모습이었다.


오르막길, 평지, 숲길들이 이어졌다. 피레네 풍경과 달리 계속 반복되는 길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다. 여기도 피레네 자락이라서 그나마 좋은 풍광에 속한다는데, 강렬한 햇살 탓에 지친 것이리라. 선글라스에 모자를 써도 따갑다. 길을 걷는 동안 강렬한 햇살 정도는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여름을 훌쩍 넘긴 이때까지도 이렇게 화살촉처럼 따갑게 내리 꽂힐 줄은 몰랐다. 햇살을 몸으로 직접 실감하자 정신이 날아갈 판이었다. 오후에 사람들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시간에 걸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 서둘러 나서야 했나 보다. 길 위에서 후회하면 뭐하리! 그저 잘 겪어나가야지!  


벌목 현장인 듯하다. 숲 속은 청정하다. 작열하는 태양도 이 숲에서는 얌전하다.


오솔길로 가다가 송전탑 지대를 지나면 한가로운 내리막길이 나온다. 한참 걷다 보니 나무 위에 있는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열매를 구경하다가 스틱으로 한 번 따 보겠다고 껑충거릴 때였다. 누군가 웃어댔다. 돌아보니, 피레네 롤랑의 샘에서 만났던 여인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듯해서 자리를 얼른 피해 줬는데! 어쩐 일로 오늘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혼자 걷는 길이 그녀에게도 지치고 지루했을까? 열매가 너무 높다며 더 긴 막대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굳이 땀 뻘뻘 흘리며 따먹을 일도 아니어서 포기하자 그녀가 웃었다. 천천히 같이 걸을 가자고 하는데, 나는 천천히 가겠다며 땡볕에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햇살이 징그럽게 뜨거워도 습하지 않아서 숨 쉬는데 지장은 없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서둘러 나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저 마음만 먹은 것이다. 아마도 내일도 내일의 태양이 뜰 때나 일어나지 않을까?


송전탑은 안 반갑다.  그래도 이곳을 기점으로 내리막길, 수비리가 가까워진다.


순례길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표지석과 노란 화살표! 이 징표는 순례자들에게 위안이 된다. 이 길이 맞다는 신호이기에!


수비리까지 내리막이라더니, 어째 오르막이 자주 나온다. 산 특성산 오르락 내리락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본격적인 내리막이다 싶은 길은 페스츄리처럼 얇은 바위들이 흙길에 세워져 꽂혀있다. 가로로 덮여있으면 지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찌 이리 흙길에 박혀 있지? 이 바위들로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여차하면 발을 헛디디고 접질릴까 봐 더 조심스러웠다. 이리저리 스텝을 밟으며 걸어가야 하니 신경이 쓰였다. 멍 때리고 걷다가는 고꾸라지기 좋은 길! 틱낫한 스님의 명상처럼, 한 발을 디딜 때마다 그 발바닥이 땅에 닿는 느낌을 온전히 깨어서 느껴야 했다. 무의식적인 걸음이 아니어야 했다. 정신줄 단단히 잡고 가야 했다.


왜 이런 돌들이 박혀있는지 모르겠다. 순례길에서 이런 길들이 많았다.


이 나무를 한참 들여다봤다. 마법에 걸린 나무 같았다. 춤을 추다가? 혹은 낮잠을 자다가 나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멀리 수비리가 보였다. 한참을 경사가 진 흙길로 내려오자 드디어 수비리에 입성!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수비리 간판이 보였다. 해자처럼 놓인 중세 다리! 그 아래로 흐르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건너편 숙소 마당은 냇가로 이어졌는지,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널브러져 있다. 널어놓은 빨래가 잔디에 휘날리고 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부러웠다. 겨우 도착한 마을, 숙소 찾는 일이 남았다. 코 앞에 있는 저 숙소가 내 숙소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약되지 않았다면 저 숙소로 갔으리라. 그런데 순례자들이 많은 걸 보니 이곳도 이미 풀로 차 버렸지 싶었다. 수비리에 방이 없다는 소식은 현지에서 더 여실히 전해졌다. 오면서도, 도착해서도 숙소를 못 잡은 순례자들을 길 위에서 만났다.


일단 숙소부터 찾자. 예약된 숙소를 찾으려고 길을 가로질러 가다가 마을 사람에게 묻자, 한참 동안 마을 외곽으로 가야 한다는 설명! 오 마이 갓의 리액션이 절로 나왔다. 작은 마을, 작은 광장, 작은 슈퍼와  빵집과 카페들! 예쁜 마을이다. 잠시 쉬면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숙소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해가 숨 죽인 늦은 오후여서인지 햇살도 은은했다. 평화로운 모습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여름날, 평화로운 어느 한 때를 떠올리게 했다. 기억나지 않은 어떤 기억! 몸이 느끼는 평화로운 한 때! 나는 여름날의 어떤 순간을 너무 아름답게 기억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억인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저 근원과 닿은 듯한  평화, 가슴 벅찬 이 순간을 영원히 담을 수 있을까?


‘수비리’를 많은 사람들이 ‘주비리’라고 불렀다. 영어식 z발음이 문제였다. 수비리든 주비리든 론세스바예스 다음으로 가는 코스라는 것만 알면 문제없다. 그곳까지 갈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 유빌립? 라임 좀 짜 보려다가 실패! 일단 숙소나 잘 찾아보세!


보기만 해도 평화로운 마을이다.


수비리는 작은 마을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마을 입구! 평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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