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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Sep 10. 2020

[산티아고 순례길]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예스!

[2일] #2. 론세스바예스 ~

숲길로 이어지는 울타리 문을 통과했다. 오르락내리락 몇 번 하다가 길을 만나게 된다. 사람 사는 마을인가 싶게 뭐가 없고, 한적하다.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길 끝에서 갑자기 론세스바예스가 나타났다. 생각지 못한 등장! 전초전 없었다. 근처 집이나 뭐도 없다가 갑자기 훅 들어왔다. 그래서 갑자기 기쁘다. 요새처럼 버티고 서있는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매력 있다. 사랑한다.


몇몇 사람들이 알베르게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서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누군가 왼쪽으로 돌아가야 문이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담배를 태우러 나왔다. 한국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거기가 입구예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한테 입구가 어디냐고 묻다니! 그는 한국말에 자동 반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덕분에 헤매던 사람들이 입구로 모였다. 

"여기 입구에서 진흙을 닦고 들어가셔야 할 거예요. 아까 관리하시는 분들이 말해줬어요."

그러고 보니, 수돗가가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아까부터 한 여인이 정성스럽게 등산화를 닦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나도 곁에 서서 기다렸다가 진흙을 닦아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툭툭 털고만 들어갔다. 몰라서겠지? 나도 그 얘기를 안 들었다면 그냥 털고만 들어갔을 것이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내부에서 본 풍경


드디어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문을 열었다. 바닥에 작은 돌들이 깔렸다. 전형적인 유럽식 바닥! 높은 천장과 큰 내부 규모, 아늑하고 세련됐다. 조명도 세련된 것으로 봐서 최근에 손 본 게 틀림없다. 왜 흙을 털고 들어가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부가 너무 깨끗했다.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 앞에 줄을 섰다. 오면서 못 봤던 사람들인데, 언제 이렇게 온 것일까?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는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듯했다. 봉사자들이 성심을 다해 친절을 베풀었다. 자신이 맡은 알에 최선을 다했다. 순례자들은 등록을 위해 선 줄이 사무실 입구까지 늘어섰다. 일단 배낭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비옷과 스틱도 벗어서 배낭 곁에 두었다. 비 오고 추운 날, 피레네 산을 넘어온 사람들! 지붕 있는 실내 복도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은은한 주홍 불빛,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 속에 비바람을 헤치고 온 흔적이 엿보인다. 줄을 서 있는 동안, 그 험한 관문을 넘어온 뿌듯함이 스쳤다. 이곳이 단지 아득하기만 해서 일까? 전투를 끝낸 기사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어디에서 출발했어?
피레네 넘을 때, 비 많이 왔니?


줄을 서면서 순례자들끼리 눈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앞 뒤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했다. 봉사자들이 등록을 위해서 여권을 준비하라고 했다.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 발급받은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봉사자가 다시 말해준다. 리얼 여권도 꺼내놓으란다. 아, 모두 뒤적뒤적 안쪽 주머니에 잘 보관한 국적이 쓰인 여권을 꺼내 든다. 기다리는 동안, 봉사자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순례자들이 많았다. 봉사자들은 친절한 미소로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었다. 질문이라야 별로 급한 내용도 아니었다. 줄 서서 무료하느니 얘기나 하자 싶은 것들이었다. 그저 여기에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오냐, 당신은 봉사를 언제부터 했냐, 정도의 질문들이랄까. 지대가 주는 에너지 때문인지, 등록 전부터 차분한 분위기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앞쪽이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사무실이다.


이제 네다섯 명 남았다. 


봉사자가 종이에 뭔가를 기록하라고 한다. 근데 스페인어인지, 불어인지, 모르는 말이 한가득이라 당황했다. 세 다리 건너에 서있던 한국 아저씨 역시 난감하던 차였는지, 어디선가 적어왔다며 메모지를 펼쳐서 비슷한 글자를 때려 맞히고 있었다. 나는 그걸 또 베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남자가 나를 보면서 의아해한다.

“당신, 영어 하잖아요?”

“네? 보세요. 영어가 아니잖아!‘

“위에 글자 말고 그 아래를 보세요!”

그러고 보니, 문장 아래에 같은 내용의 문장이 여러 나라 말로 한 줄씩 있었다. 어렵지 않은 영어문장! 당황해서 전혀 영어처럼 안 보였던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봤을 때도 모르는 문장으로 보였는데, 희한했다. 고객님이 당황하신 거지!

“하하하. 정말 영어가 있네요!”

그러자 한국 아저씨들도 당황하니까 안 보였다며 놀라워했다. 역시 누구나 긴장하면 어리바리 해지나 보다. 


드디어 내 차례다. 


한국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만 묵을 수 있는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나는 예약 번호를 봉사자에게 보여줬다. 봉사자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었다. 엄마 미소로 나를 환영했다.

“반가워요! 저녁이랑 아침은 어떻게 하실래요?”

“아, 그것도 지금 말해야 하나요?”

“네, 지금 말해주세요.”

나는 두리번거렸다. 메뉴에 따라 식당이 달라지는 듯했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신청한다는 것을 신청했다. 

“저녁만 신청해도 되죠?”

“그럼요.”

봉사자들 대부분은 나이를 먹었지만 무척 친절한 미소로 일을 했다. 무엇보다 지성미 물씬 풍기는 평온한 미소를 지녔다. 나이 들면 가지고 싶은 그 미소, 그들처럼 나도 잘 늙어가고 있나?



왼쪽 출입구는 자판기와 전자레인지를 갖춘 큰 휴게실, 작은 도서관,  엘리베이터와 세탁실로 가는 계단들이 있다.


봉사자의 안내로 등산화는 입구 쪽에 있는 별실에 벗어 보관했다. 스틱도 함께 두었다. 내부에 자판기와 간단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들이 놓여 있는 곳도 보았다. 정말 깨끗했다. 불빛은 왜 이리 은은하고 고풍스러운지! 정말 매혹적이었다. 이제 침대로 가서 배낭을 내려놓고, 샤워를 하고 밥을 먹으러 가면 되겠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있다는 숙소 방으로 올라가면서 안면 있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막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보니 아, 내가 잊은 게 있었다. 생장에서 미리 이곳으로 보낸 내 큰 배낭, 동키로 보낸 내 배낭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이틀 동안 물과 비옷, 스틱만 들고 다녔더니, 큰 배낭에 대해 아예 잊은 것이다. 바리바리 꼭 필요해서 없으면 큰일 날 듯 무게 오버하며 가져온 배낭을 잊다니! 정말 필요한 게 들어있는 게 맞나? 아쉽지 않은 거 같은데? 
짐은 자기 인생관과 닮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부터 남보다 무거웠던 짐,
버리지 못한 짐을 찾으러 나서야 했다. 


나이 지긋한 봉사자에게 물으니, 별도의 보관 창고로 따라오라고 했다. 사무실 안에 보관 중인 배낭은 오늘 보내온 배낭이라고 했다. 아마 내가 어제 오기로 했다가 하루 미루어서 별도의 창고로 간 것 같다. 지붕 없는 마당을 가로질러 별채로 들어갔다. 커다란 나무 문을 덜커덩 열고, 불을 켜주었다. 저 안 쪽 창고 선반에 배낭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서 찾아봐요!”

별도로 표식 없이 놓아둔 것인지, 내가 직접 찾아야만 했다. 

 눈에 딱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배낭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보이지 않았다. 조마조마했다. 내 짐이 없으면 어쩌지? 내가 짐을 잘못 보냈으면? 아니면 중간에 없어진 거 아니야? 동키를 처음 보내는 거라 그 짧은 시간에 괜한 걱정이 쏟아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레인커버를 씌워서 보낸 게 생각났다. 레인커버 색을 떠올리자, 그제야 내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휴, 찾았다."

내 긴장이 좀 우스웠을 텐데, 봉사자는 말없이 나를 기다려주더니,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을 찾아가서 찾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멍하니 눈 앞에 있는 배낭을 못 찾는 나를 어찌 그리 이해해준단 말인가. 그가 유쾌한 웃음으로 선반에 있던 내 배낭을 자신의 어깨에 메 본다.

“와우! 이거 너무 무거운데? 무거워!”

그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구까지 메고 가더니만, 문을 열면서부터 내게 배낭을 건넸다. 네 인생은 너의 것! 네 가방은 네가 짊어져야지! 배낭이 너무 무거우면 조금 덜어야 하지 않겠니?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눈빛! 당연하죠! 내 배낭은 내가 짊어져요. 짐은 언젠가 덜 거예요. 언젠가!  



75리터가 아니다. 7s 사이즈! 많이 담기지 는 않았지만, 돌덩이처럼 꽉 채워 다녔다. 순례길 내내 나와 함께 한 내 삶의 무게!




배정받은 침대 번호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번호가 끝나더니, 어디에서 이어지는지 안 보였다. 다시 입구 쪽까지 둘러보는데, 입구 계단 간이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침대 번호가 어떻게 돼요?”
아, 여기도 봉사자가 있구나! 난 번호가 적힌 종이를 보여줬다. 그녀는 단번에 “알아요!”하며 앞장서 걸었다. 오, 숙련된 봉사자군! 그녀는 날씬한 중년이었다. 짧은 언발란스 파마머리가 세련되어 보였고, 미소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드디어 내 침대를 찾아주었다. 


앗, 이게 뭔가? 왜 2층이지? 왜지? 


미리 예약한 사람들은 1층 침대이라던데? 웬 2층? 그것도 화장실 입구 쪽 마지막 라인이었다. 살짝 당황했지만 침대를 찾아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뿌듯함 때문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아래층에는 한국 아저씨가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한 듯 침낭도 다 깔아놓고 빨래 보따리를 챙기고 있었다. 

“일찍 도착하셨나 봐요. 1층이시네요. 전 2층이네요.”

“예약을 안 하셨나요?”

“했어요. 늦게 예약해서 밀린 건가 봐요.”

“그런가 보네요. 저는 미리 했거든요.”

나를 안타까워하던 그가 침대 옆에 있는 사물함을 안내해주었다. 돈을 넣어야 문이 열린다며 동전까지 내게 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해도 그는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신세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나중에 동전을 바꿔서 줬는데, 그도 나도 몰라서 떤 유난이었다. 보관함을 열면 다시 1유로가 나오는 구조였기에 나중에 돌려주고 돌려받으면 됐는데 말이다. 


동전인데 뭘 돌려주냐는 분의 마음은 한국식 마음이다. 마치 우리나라 100원이나 500원 정도로 생각하게 되는데, 1유로가 1,300원이다. 나중에 체감이 될 때는 1유로도 우스운 건 아니게 된다. 한국인들은 동전 정도 베푸는 걸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겠지만 그 마음도 큰 것이다. 나도 나중에 동전이 무거워서 없애겠다며 자판기에서 50센트 커피를 마구 뽑아서 한국 친구들과 나눠 마셨는데, 그게 싼 게 아니었다. 순례길에서 친구들에게 커피 한 잔 주는 게 아깝다는 게 아니다. 자판기 커피를 700원~ 800원으로 뽑아 먹을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머리는 한국식 기준으로 자판기 커피 300원 정도로 인식했었는지, 그곳에서는 카페에서 1 유로면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굳이 자판기에서 50센트 넣고 커피를 마실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가에 적응하고, 그 물가에 따라 뇌가 적응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배낭을 풀어서 짐을 꾸라다가 보니, 봉사자라 여긴 그녀가 내 옆 칸 2층 침대를 가리킨다.

“이건 내 침대예요!”

“어? 당신 봉사자 아니었어요?”

“아닌데요? 나도 순례자예요!”

그녀가 내게 베푼 열정을 하마터면 봉사자의 친절 정도로 여길 뻔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순례자임을 알고 그녀를 껴안아줬다.

“고마워요! 당신의 친절에 감동했어요.”


그녀의 이름은 메디! 


메디는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현재 독일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니 비밀이란다.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하는데,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혹시, 핵이라도 개발하냐는 우스갯소리를 건넬까 싶다가 말았다. 어쩌면 국제적으로 할 농담은 아니라는 생각! 나에 대해서는 다 물어놓고, 자기는 왜 비밀이지? 알려진 사람인가? 안타깝게도 난 외국인은 잘 구분을 못한다. 우리가 잘 접하는 할리우드 유명인들도 손에 꼽히는 정도일 뿐, 유럽권은 아예 모른다고 해야겠지? 어쨌든 모델처럼 잘 가꾼 모습을 보니, 노출이 되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길에서 잠깐 만나는 사람인데, 정치인이면 어떨 것이며 코미디언이면 어떨 것인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 인생에서 극적 변화를 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차피 배낭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지 않은가. 여행에서 만난 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거나 깊이 가지 않거나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만났던 풋풋한 마음을 일상에서 가끔 추억으로 만나는 건 좋다. 하지만 일상 깊이 들어오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오죽하면 여행지에서 만난 이성을 일상에서 만나지 말라고 했겠는가. 에너지가 달라서 일 것이다. 물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끼리 사랑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때의 에너지를 유지하며 잘 이어왔을 것이다. 좋은 인연도 오래 유지될 수는 있다. 진심으로 함께 했던 추억이 행복했다면 그 인연들은 오래간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다른 여행지를 가면서 추억이 희석되기도 한다.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내면서 열정이 사라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말로 하면 상처 받지 않으려는 얄팍한 마음만 남겨두는 것일지도! 어차피 떠날 사람, 정 주지 않겠다는 다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아직 젊은것이다. 사람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이다. 이해관계를 떠나 누군가를 위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음, 그게 바로 열정이고,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니겠는가.  


메디는 나와 죽이 척척 맞았다. 


여전히 봉사자 포스로 나에게 화장실부터 세탁실, 식사 시간과 식당 등을 안내하고 있었다. 내가 예약한 저녁 코스가 자신과 같은 식당에서 먹는 거라며 좋아했다. 난 그때까지 이게 왜 좋아할 일인지 몰랐는데, 여기서는 식당이 여러 개 있어서 메뉴에 따라서 나뉜다는 것이다. 

“좋았어요. 우리가 갈 식당이 제일 맛있어요. 잘 고른 거예요. 이따가 같이 가요!”

“그래요? 좋지요! 알았어요.”

메디는 저녁 식사 때 다시 보자며 어딘가로 나갔다. 나는 꾸리다가 말았던 짐을 정리하느라 배낭을 복도 한쪽에 펼쳤다. 침대 사이는 좁았기에! 가부좌로 앉아서 짐을 꺼내다가 보니 오다가다 안면 있는 순례자들이 아는 척을 해왔다. 드디어 로만손 일행을 보게 됐다 개구쟁이 아저씨 마마드였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정이 많은 스타일이다.

“왔구나! 생각보다 일찍 왔네? 비가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잘 왔구나!”

"다른 분들은요?"

"응, 샤워하려 갔어. 로만손은 저기 있네!"

로만손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같은 층이지만, 그들은 초입 쪽에 침대가 있는 것이다.

"힘들었죠? 잘 왔어요."

“네, 고마워요. 당신들이 어제 오리손에서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여기 없었을 거예요.”

마마드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일행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

"좋지요. P선생님은 제가 찾아볼게요. 이따가 뵙죠!"

그들은 싱글거리며 자리를 떴다. 나는 생각난 김에 내게 카톡으로 자신의 침대 위치를 알린 P선생님을 찾아봤다. 나와 층이 달랐다. 그곳도 2층 침대들이 놓인 곳이었다. 자리를 찾았지만, 침대 위에 짐만 있었다. 다시 내려와서 이따가 저녁 식사 때 보자는 카톡을 남겼다. 


얼른 샤워부터 해야지 싶었다.


 비에 젖은 빨래들도 주섬주섬 챙겼다. 그때 누군가 가방을 멘 채 내 앞에 섰다. 손에 번호표를 들고 내가 아까 침대를 찾느라 지었던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그 친구였다. 파리에서 봤던, 갓 제대한 청년!

“어허! 번호가 뭐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자, 그가 돌아보더니 반갑게 웃었다. 인사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여기 같은데 이상하네요?”

그가 가리킨 곳은 내 아래층 한국 아저씨 자리였다. 한가롭게 누워있다가 뭔 날벼락이냐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표정은 뭔 개소리? 였다.

한국 아저씨와 내가 동시에 일어나 청년의 번호표를 살폈다. 청년이 들고 있는 번호표와 아저씨의 침대 번호가 일치했다. 극장에서 자리가 중복될 때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배 째라 하면 뒤늦게 온 사람이 매표소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 콘서트장에서 중복된 자리 때문에 애 먹었던 때가 있었다. 주최 측에서 좌석을 중복으로 팔아먹었다. 연애하며 처음 갔던 콘서트였는데, 매표소 직원들과 실랑이 벌이며 불쾌했던 감정으로 콘서트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좋은 추억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았다. 무던한 그 사람 때문에 그냥 넘어간 일이지만, 아직도 내 뇌리에 콘서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나의 오지랖이 발동했다.


한국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번호표를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숫자가 비슷하긴 해도 어째 명확하지 않았다. 

“이게 글자체가 이상해서 숫자가 비슷한 것 같긴 한데, 좀 알아보셔야겠는데요?”

하지만 한국 아저씨는 자신의 번호표가 맞는데, 청년이 중복된 번호표를 잘못 받아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무실 가서 다시 받아오라는 거였다. 순진해 보이던 청년은 아저씨의 번호표를 보더니 자신의 번호표가 확실하다고 여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한국 아저씨가 마지못해 자기가 사무실로 내려가서 확인하고 오겠다고 했다. 한국 아저씨가 자리를 뜬 사이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를 진탕 맞았는데 피곤한 데 이런 귀찮은 일까지 겹쳐서 지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내가 어떻게 자기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했는지 궁금해했다. 나도 궁금했다. 나보다 먼저 간 청년이 느린 나보다 더 늦게 왔는지! 내가 지름길로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오실 때 비 안 왔어요?”

"비 왔지!"

사실 내가 올 때는 비가 미친 듯이 내리지 않았다. 중간에 그런 구간들도 있었지만, 거의 다 내려와서 비를 많이 맞았다. 나보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중간 지대부터 비를 엄청 맞았다고 했다. 비옷이 소용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오늘 생장에서 출발해서 쉬지 않고 온 사람들이 나보다 뒤늦게 론세스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청년과 한 두 번 만났다고 말을 편하게 하게 되었다. 꼰대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면 할 수 없지만, 청년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이 아직 많은 듯했다. 내가 짐을 챙기면서 오리손에서 묵게 된 사연을 짧게 말하자, 청년이 비옷을 걸어두라고 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간이 옷걸이를 펼쳤다. 청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와우! 신의 한 수네요. 옷걸이까지 가지고 오시다니!”

눈빛이 순수한 청년이었다. 군대에서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모든 게 신기한 듯했다. 어디서 본 눈빛이더라? 어디서 봤더라! 그때 떠오르는 얼굴! 배낭여행 때 봤던 얼굴, 까맣게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오르다니!


인도 바라나시에서 봤던 청년!  기차 시간까지 서너 시간 남은 동안, 그는 체크 아웃을 하고 배낭을 내 숙소에 잠시 맡겼다. 그 와중에 화장실을 쓰겠다며 들어갔던 그가 웃으며 나왔다. 
"고무장갑이 있네요? 배낭여행하면서 고무장갑 들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봐요!”
배낭여행 베테랑이던 그가 놀라워해서 내가 더 놀랐던 때! 고무장갑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 때였나 보다. 나는 그때 머리를 긁적였던 것 같다. 가려워서인가, 민망해서인가, 여하튼 그랬다. 마더 테레사 집에서 봉사할 때 쓰려고 가지고 다니던 건데! 정작 꼴까따 마더 테레사의 집에는 딱 하루만 봉사 나가고 때려치웠다. 나는 그런 종류의 봉사가 안 맞는 사람이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자들에 대한 경외감만 커졌다. 


드디어 한국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 이 번호가 이거네요. 저쪽 복도 중간 침대인데 2층이에요. 예약도 했는데 왜 그런지!”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가 가려워서일까, 무안해서일까. 나는 그가 무안하지 않게 오지랖을 발휘해서 서너 칸 옆에 있는 그의 침대를 확인했다. 2층이었다. 2층 침대는 예약과는 상관없는 듯했다. 오는 순서대로 그냥 주는 것인지! 3층은 단층 침대만 있다는데, 그 숙소 방은 어떻게 가는 건지,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화장실 앞보다는 아늑하네요!"

그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는지, 한국 아저씨는 조금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그제야 자기 침대를 온전히 가지게 된 청년은 조금 편해진 얼굴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짐을 꾸리며 1층 청년과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위치였다. 무슨 짐을 이리 오래 챙기는 건지 샤워를 일단 해야 하는데 지쳐서 그런지, 빨래터 아낙처럼 수다를 떨게 된다. 

“세탁하실 거예요?”

“해야지! 같이 할까? 함께 하면 반값이니까!”

내가 주책인가? 나이 먹은 여자가 젊은 남정네와 빨래를 함께 하자는 게 이상하려나? 하지만 그는 오예! 하는 표정으로 빨래 주머니에 자기 빨래를 벌써 담으며 좋아라 했다. 역시 순례자 모드로 잘하고 있군! 돈을 줄이는 게 순례자에게 중요하지! 아까 한국 아저씨한테도 빨래를 같이 하네 마네 했던 터라, 셋이 같이 하자고 해야 하나 싶었다. 너무 격의 없는 건가? 외국 친구 들랑은 아무렇지 않은데, 한국 사람들과는 장유유서니, 남녀 칠 세 부동석이니, 맹자왈 공자왈이 머리를 스쳐 간다. 이런 고민을 한방에 날려준 건, 세탁실 봉사자였다. 내 빨래가 까였다. 내 세탁물이 많아서 따로 해야 한다는 것! 졸지에 혼자 빨래 값을 치르게 됐다. 그 남자 둘은 함께 하게 됐는데! 괜히 신나 했다. 하지만 빨래 양으로 까인 거니까, 인정! 


지하 세탁실에서 로만손 일행을 봤다. 


구석에 있는 손빨래 수돗가에서 직접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모습이 순례자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루하루 샤워처럼 빨래도 해야 하는 거다. 내가 로만손 곁에서 싱글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빨래까지 하려니 피곤하겠어요?"

로만손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세탁기를 이용할 정도 양은 아니니까요. 이 정도는 손빨래하면 되는데요. 뭘!"

그는 노인들을 위해서 순례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정말 순례자 모드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때 봐요."

로만손의 미소, 참 좋다. 저런 미소를 지닌 사람이라면?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세탁실에서 나왔다. 

사무실이 있는 층에는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판기와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식당 테이블과 의자가 넉넉히 놓여서 그곳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데워 먹기 좋았다. 그 옆으로 작은 도서관도 있었다. 한국 책도 한 두권 있었지만, 무거워서 패스다.


복도에 테이블이 놓여있는데, 버릴 물건을 놓은 곳이었다. 나는 휴대용 커피포트를 발견했다. 정말 가볍고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였다. 이건 욕심이 났다. 품에 안고 일단 식당에 앉았다.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인데, 무슨 생각인 거니! 넌 지금 버려야 해! 있는 것도 버리고 가야 한다고. 근데 뭐? 또 가져가?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내 옆에서 이런 말을 해주기라도 하듯 나는 혼자 혼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커피 포트는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어린 왕자 한국판 동화책을 손에 들었다. 여기서 그냥 읽다가 두고 가야 한다. 모처럼 만난 한글로 된 책, 그것도 동화책, 철학이 담긴 책이니 좋았다. 커피포트처럼 한동안 품고 있다가 두고 가야지!



필요한 분 가져가세요, 코너! 다르게 말하자면, 필요 없는 것 내려두세요, 코너이다.  피레네를 넘고 나서야 두고 가는 짐들!




저녁시간에 맞춰 메디가 왔다. 


“준비됐어?”

“그래, 가자 가자, 배 고프다!”

영어는 존댓말이 없다. 그저 정중하냐의 차이지만, 메디와 나는 벌써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편의상 머릿속에서 친구처럼 반말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파레네 중턱에서 만난 브라질 여인 마기를 만났다.

“와우~! 마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날은 이제 어두침침해졌다. 비가 내린 턱에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다. 마당에서 마기와 함께 메디랑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가 마음껏 개그맨 포즈로 모델처럼 자세를 취하자 마가와 메디가 깔깔 거리며 웃었다. 처음에 얌전하다 싶더니만, 이제 자기들도 마당에서 멋진 포즈로 서있는 게 아닌가. 함께 빙그르르 돌면서 기념사진을 마쳤다. 이제 정말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했다. 아까 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못 들어갔다. 그저 밥이라도 제대로 먹어야 영적 허기를 채울까 싶었다. 아직 식당 문이 열리려면 더 있어야 했지만, 미리 가서 줄을 서자고 했다. 그런데 마기는 식당이 달랐다. 안타깝지만 밥을 먹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성당도, 식당도, 모두 이 내부 마당을 거쳐 간다.



메디와 나는 앞 쪽에서 서있었다. 


드디어 밥 먹기 전에 P선생님을 만났다. 그런데 P선생님 역시 식당이 달랐다. 대부분 같은 식당일 거라고 하더니만 나뉘게 됐다. 하필 로만손 일행과 P선생님이 같은 식당이 아니었다. 로만손 일행은 나와 같은 식당이었다. P선생님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둥근 테이블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나뉘어 앉기 시작했다. 메디는 제일 구석 자리로 가자고 했다. 저렇게 구석까지 할 정도 구석자리! 로만손 일행과 메디랑 같이 앉아야지 싶었는데, 테이블 당 4명만 앉게 되어있었다. 난감했다. 오리손에서 자리를 맡지 못한 일이 또 재현되었다. 


로만손 일행 중 마마드가 먼저 식당에 들어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에게 고민하는 표정을 날렸다. 의자 수가 맞지 않아서 어쩌나 싶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테이블에 들어섰다. 로만손 일행도 뒤늦게 식당에 들어서서 근처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이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기 시작했기에 오리손 때처럼 나는 그들과 합석할 자리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들은 나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오리손에서 묵으라고 권했을 때도 온전히 나를 위해서 그들이 권했다는 것을 안다. 내가 P선생님이 내게 함께 묵자고 해도 나는 그냥 가겠다고 우겼다.  상황을 보다가 한 보 후퇴한 듯하던 그들이 조심스럽게 오리손에 묵는 게 좋다고 했을 때 내 눈치를 봤다. 


내가 그들과 더 친해지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정말 고맙고, 정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천사라고 생각했지만, P선생님이 그들에게 바짝 붙어서 멀찍이 떨어진 것도 있었다. 함께 어울리며 다닐 정서적 교류가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조금 질려있는 상태였다. 역시 나의 선입견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호감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밀어낸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피레네를 넘을 때는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화딱지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가! 가란 말이야! 말은 안 했지만 내 표정에서 그걸 느꼈을지 모르겠다. 내 눈치를 보는 건 느꼈다. 원래 나라면 반성 모드로 그녀에게 잘 대해주려고 애썼을지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틈을 주면 나를 쥐려고 할 것 같았기에! 로만손과도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P선생님과 함께 해야 했다. 나는 그냥 홀가분함을 택했다.


우리 테이블로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뜻밖에도 외국 여성과 한국 남자이 왔다. 외국 여성은 긴 머리에 짧은 앞머리를 한 소녀 취향의 여인이었다. 표정도 순진한 소녀처럼 지었지만 신선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옆에 있는 한국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를 무척 신경 쓰는 얼굴이었다. 이 테이블로 온 건 그녀의 선택인 듯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커플 비슷한 분위기였다. 여성의 나이가 월등하게 많았지만 남자는 많아야 30대 초반 정도? 그는 나를 보자마자 똥 씹은 표정이었다. 아놔~! 하필 한국 여자가 있는 테이블이야~! 왜 여기에 앉아야 하냐고~! 커플 여자를 원망하듯 보는 한국 남자! 어물쩡거리며 내 눈을 피했다. 나도 표정으로 응수했다. 야, 나도 불편해. 나도 썩 보고 싶지 않은 장면 본 것 같다, 야! 어린 녀석이 왜 늙은 여자한테 붙어서 그래? 뭘 바라는데? 나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방어적 태도에 거부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식사와 함께 나오는 와인, 순례길 내내 와인은 물보다 더 친근하게 따라다녔다. 나에게는 그림의 와인일 뿐!



메디는 원래부터 만나기로 한 사람처럼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까무잡잡한 사람은 호주에서 일을 하다가 순례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그의 커플 여인은 호주인이었다. 말하다 보니, 순례길 초입에서 만난 것이지 원래부터 알거나 특별한 관계는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호주 여성이 그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앞으로 그와 함께 순례길을 걷게 되는 것처럼 말을 했다. 순례길 파트너를 만났다고 여긴 것이다. 그녀는 오리손에서 묵었고, 그때 이 남자는 오리손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리손에서 론세스까지 오는 동안 정도에 만난 것인데? 아니면 여기 론세스 도착해서 만났을 수 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저런 사랑에 빠진 표정이 나올까. 오리엔탈리즘, 신비로움을 가지고 동양 남자를 대하는 느낌인가? 남자가 가무잡잡한 피부가 서양 여자들에게 섹시한 동양 남자로 인식될 수 있겠다 싶었다. 남자 얼굴이 많이 탔다. 피서 갔다 온 얼굴처럼! 


생선 스테이크를 시켰더니 정직하게 생선이 딱 나왔다. 


내가 생선을 그렇게 무서워한 적은 처음이었다. 맛은 괜찮았다. 식사를 하며 옆 테이블에 한국 사람들이 있어서 인사를 나눴다. 그거 맛있냐, 먹어봤냐, 먹어봐라 한국인들이 주고받는 오지랖! 30대 이상은 가능하다. 내 테이블에 있는 한국 남자는 그들과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한국 사람이 싫은 눈치였다. 나는 한국인이 싫어요! 얼굴이 써붙인 듯했다. 그는 영어 연습을 위해 서양인들과 대화하기만 원하는 듯했다. 한국 사람은 대놓고 싫어하는 모습! 나중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것이 내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슨 상처를 받은 것일까?


튀겨진 것도 아니고, 생선이 너무 정직하게 나와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식사 시간이 의외로 즐거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는 로만손 테이블로 갔다. 함께 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찍자고 했다. 메디가 놀란 눈으로 이들을 어떻게 아냐고 했다. 자신도 이들과 인사를 나눴던 모양이다. 내가 식당에서 그들을 처음 봤다고 여긴 것인지! 로만손 일행은 지쳐서인지, 술을 마셔서인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혹시 내가 테이블을 안 맡았다고 섭섭해하는 중인가? 내가 자기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피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소심 모드! 그런데 자기들끼리도 별 대화가 없다. 나는 메디에게 그들이 나에게 친절을 베푼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며 자리를 떴다. 


메디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한가롭게 알베르게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다. 메디는 내일 아침도 같이 먹자고 하는데, 나는 내일 예약을 하지 않았다. 메디는 아침 식사도 훌륭한데, 왜 안 했냐고 한다. 사실 식단은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맛이 좋다고 했다. 후회가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메디는 어딜 좀 가보겠다며 숙소에서 보자고 했다. 그녀는 왠지 바빴다. 마당을 걸어가는데, 마기가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우리는 함께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가 숙소 복도 불빛이 예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안쪽에 자판기가 있고 테이블이 있는 휴게실, 작은 도서관과 쉼터도 가보았다. 밤이 되니, 주홍 불빛이 더 아늑하게 비쳤다. 유럽식 건물을 리모델링해서인지, 더 신비로웠다. 마기는 내 스타일을 파악한 듯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아직 저녁식사에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복도에 사람들이 없었다. 우린 아이들처럼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저녁을 먹고 침대로 돌아와 보니, 그 많던 침대에 사람들이 꽉 들이찼다. 이를 닦고 어쩌고 하는데, 한국인 단체 손님들이 언제 들어왔는지 왁자지껄 했다. 수련회 느낌이었다. 너무 대놓고 한국말로 떠들어서 조금 민망했다. 이런 정도의 소음은 실례일 텐데, 왜 그러나 싶었다. 어디선가 들었다. 한국인들이 순례길을 노 매너로 알려졌다고! 그래서 한국인끼리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어쩌면 식당에서 봤던 한국 남자도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을까? 사람이 귀할 때라면 반가웠울 테지만, 차고 넘치는 한국 사람들! 그리고 아직 초입이라 한국 사람들이 그리운 때도 아닐 것이다.   


메디가 양치까지 끝내고 2층 침대에 오른다. 예쁜 슬립을 입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조금 야한 옷이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저리 짧은 슬립을 입고 2층 침대를 오르다니! 메디를 몰랐다면 눈살을 찌푸렸을지 모르겠다. 꼰대스런 눈길을 잠시 보내면서도 나이를 먹어도 자신을 젊게 가꾸려는 메디의 열정에 감탄을 했다. 건너편 2층 침대에서 메디는 책을 읽고, 나는 가수면 상태로 누워 있었다. 사람이 많아도 아늑하고 좋았다. 코 고는 사람만 없다면 아주 좋은 밤이 될 것 같았다. 복도 끝이라고 해도 내부 온도가 높아서인지 참 따뜻했다. 화장실이 가까워서 걱정했지만 현대식이라 깨끗했다. 오히려 중간에 화장실에 가기에 좋을 것이다. 발이 삐끗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2층 침대에 오르내릴 때도 문제없었다. 그래, 이 정도면 훌륭하다. 나의 까미노! 내일 다시 시작이다.



<론세스바예스에 관련된 전해지는 이야기>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전설 1.

전투가 있던 날, 아군과 적군의 시신이 엉켜있었다. 함께 매장을 해야 할 판이라서 구분할 수 있는 증표가 절실했다. 기도를 하자 시신의  입에서 장미가 피어났다. 이를 기준으로 분리해 매장했다는 전설! 이게 바로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뜻을 지닌 론세스바예스 지명의 기원이라고 한다.


전설 2.

야고보 성인 기적이 처음으로 일어난 시사 골짜기! 기사들이 순례를 떠났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말고, 서로 돕자는 맹세를 했지만 정작 기사가 병에 걸리자 그를 두고 모두 떠났다. 오히려 맹세를 하지 않은  기사 하나가 남아 그를 돌봐주었다. 그러다가 시사 골짜기에서 모든 기사가 죽게 되었다. 남은 기사들이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 때 누군가 말을 타고 와서 두 순례 기사를 말에 태워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데려갔다. 그가 바로 사도 야고보였다. 순례를 계속하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한다. 


전설 3.

론세스바예스의 성모 발견 전설, 10세기경, 목동들이 밤에 가축을 돌볼 때였다. 뿔이 환하게 빛나는 사슴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호기심 많은 목동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사슴을 뒤쫓아 갔다. 사슴이 걸음을 멈춘 채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을 파보란 듯 목동들을 쳐다보다가 사라졌다. 목동들은 힘을 모아 땅을 팠다. 땅 속에 모셔져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을 발견! 이후 이곳에 성당이 세워지고, 발견된 성모상은 현재 건물 안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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