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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Aug 27.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어떠한 체험도 기억이 될 뿐!

[0일] 파리에서 ~ 바욘 ~ 생장까지

테제베를 타보다니! 그것도 2층!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역방향이다. 예약 중에 이것저것 비교하다가 체크 부분을 놓친 것이다.
정방향을 체크하지 않으면 역방향으로 찍히나 보다.
예약 당시 빈자리가 많았는데, 굳이 역방향을 택하다니!
처음 타는 테제베! 문워크 가락에 몸을 실어야 한다.
4시간만 가면 바이온에 도착할 것이다.
정방향이고, 역방향이고! 못다 한 잠을 청하면 금세 도착하겠지.
어떠한 체험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될 뿐!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두근두근두근! 테제베 2층 전망이 기대된다. 기차 안에 오르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역방향 자리도 빼곡하다. 정방향이 마감되고 난 뒤, 어쩔 수 없이 역방향으로 예약했을 것이다. 나처럼 역방향부터 미친 듯이 예약한 사람은 없겠지! 괜찮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유럽 기차를 예약한 게 어디인가!


테제베 2층 내부


큰 짐은 객차 입구마다 놓인 짐칸에 놓으면 된다. 선점한 자리에 배낭을 비집어 넣어봤다. 공간이 있다. 안으로 들어오면 좌석 위에도 작은 짐을 넣을 공간이 있다. 가방 같은 짐들은 좌석과 좌석 사이 여유공간, 즉 발치 아래에 두어도 된다. 아무리 빨라도 비행기처럼 날아가지는 않으니까! 좌석 앞에 비행기처럼 개인 테이블을 펼칠 수 있게 되어있다. 유에스비 포트도 있어서 충전하면 된다. 와이파이는 등록만 하면 공짜로 쓸 수 있다는데, 포기했다. 그냥 4시간 동안 잠이나 잘까 싶었다.


식당 칸에 가면 음료와 커피,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다. 구경도 할 겸 이따가 화장실 가면서 식당 칸이나 가보자 싶었다. 창가에 앉은 여인이 아까부터 계속 들락 달락이다. 처음에는 화장실을 간다더니, 이젠 커피를 마시겠단다.

한 번에 하면 안 되는 거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미소로 몸을 비켜준다. 잠시 후, 그녀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마시고 왔나?라고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테제베 내부


얼마 안 가서 열차가 어딘가에 정차한다. 창가 여인이 다시 일어선다.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잘랑 말랑 할 때여서인지 몸을 비켜주는 각도가 살짝 비협조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쩍벌 모드로 성큼 나를 지나간다. 긴 다리여야 가능한 각도다. 그녀가 한참 후에 돌아왔다. 커피를 손에 들었다. 나는 얼른 비켜준다.

아까처럼 건너다가 내 머리를 등신불로 만들면 어째! 커피가 무기다.


"열차 커피 맛있어?"

"아까 안 마셨어. 줄이 길었거든!"

"지금은 사람 없어?"

"응, 지금은 줄이 짧아졌어!"


나도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식당칸으로 넘어갔다. 짐칸을 지나며 보니, 내 배낭 위로 큰 가방이 턱 얹어져 있다. 괜히 기분 나쁘다. 짐을 쭉 밀어서 내 배낭을 한쪽으로 세웠다. 시작도 하기 전에 큰 짐에 깔리는 건 싫다. 더군다나, 새 배낭이니까! 짐칸 옆에 있는 화장실부터 들렀다. 깔끔했다. 때제베를 타 본 감격으로 여기저기 둘러봤다. 유럽에 온 것도, 테제베를 탄 것도 비현실적이었다.


파리 지하철역 내부
파리에 놓였을 때부터 그랬다. 비록 지하철역에서 재킷 주머니에 손이 들어오고, 쓰윽 돌아보니,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히스패닉 두 여자! 나는 버릇처럼, 죽을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뭐가? 하는 3초의 대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여기 나 혼자구나.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울고 불어도 소용없는, 그야말로 나 혼자 파리 지하철역에 있지! 나는 조용히 눈으로 말했다. 이것들아! 아주 그냥 손놀림 빨라~! 깜빡당할 뻔했어! 그들은 물길이 바위를 스치며 흘러가듯 사람들 속으로 흘러 가버렸다. 아놔~! 뒷모습을 보니 살짝 열 받는다. 대충 두른 차림새가 다 명품이다. 재활용에서 건진 낡은 제품인지 모른다. 파리 재활용품점에는 명품이 있겠지. 이 소매치기들아. 꼭 그렇게 순례자 주머니를 노려야만 했냐! 나중에 야간투어 가이드가 말했다. 재킷 주머니는 그들 것이다.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해라. 즉, 버릴 것만 두라는 것! 버릇처럼 휴대폰과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단체 투어객들도 많이 모이는 야간투어 집합지! 특별히 현금을 많이 소지한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조심해야 할 듯하다.



커피 한 잔을 사서 자리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풍경은 그저 초록색이다.


생각과 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옆 자리 여인은 아무리 봐도 순례자는 아닌 듯하다. 복장부터, 긴장감 없는 표정까지 왠지 유추할만한 건더기가 없다. 기차 안에 생각보다 순례자가 보이지 않는다. 짐칸에 배낭도 거의 없다. 어쩌면 아직 순례자 모드가 아닐 수 있다. 생장에 도착해서 짐을 산티아고까지 부치는 일이 있다고 하니, 캐리어 상태로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게 아닐까. 왠지 처음부터 외로웠다. 순례자는 과연 어디에?


테제베 내부




어느새 바욘에 도착했다.  대기실에서 1시간가량 기다렸다가 생장 가는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한 시간 더 가야 생장이다. 바욘도 아름다운 도시란다. 데카트론도 있어서 순례 전에 들리는 코스이기도 하다. 큰 배낭을 메고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조금 쉬다가 가야지 싶었다. 아까 테제베 기차에서 내릴 때 한국 중년 부인과 함께 있게 됐다. 옆에 젊은 처자들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중년 부인은 서양 할아버지와 이별식을 하느라 바빴다. 기차 옆자리에 앉아 진한 우정을 나눴단다. 할아버지는 기업의 오너이고,  자신에게 커피를 사줬고, 오는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처음 만난 나에게 묻지도 않은 처음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친해지면 부담스러운 존재 같았다. 일단 처음 만나자마자 개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피곤하다. 처자들도 예의상 중년 부인 곁에 있을 뿐,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들도 중년 부인을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거란다. 중년 부인은 노란 손수건의 한 장면처럼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를 돌아봤다.


"아, 미안해요. 저분 정말 좋은 사람이야. 기차에서 손수 커피도 사 와서 나한테 건네주고, 나랑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거 봐요. 아참, 우리 기차 기다리는 동안 커피 마실까요? 내가 살게요."

비가 내렸다. 커피를 마셔도 좋지만, 데카트론을 가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지도를 열어 거리를 보려고 하자 중년 부인은 여기에 데카트론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베테랑인 줄 알았다. 이곳에 자주 오는 분이구나 싶었다. 유럽 어디에 사는 교민인가?


바욘 역


바욘 기차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비 오는 바욘에서 배낭 멘 모습을 찍는 것도 의미가 있는 듯했다. 이제 거지꼴로 돌아다닐 텐데, 적어도 시작은 이렇게 멀쩡했다는 인증숏 정도? 길 건너에 카페가 있었다. 그런데 젊은 처자들이 주저한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에는!"

중년 부인이 얼떨떨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냥 차만 마시면 되는 건데?"

나는 얼른 스마트폰을 열어보았다.

"아, 정말 그러네요? 30분도 안 남았어요. 후루룩 커피 마시고 나오기에는 조금 아깝네요."

중년 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생장에서 커피 마실까요?"

눈치가 없으시구나! 이 친구들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는 얘기인데!

"굳이 안 사셔도 돼요. 똑같은 순례자인데요. 뭘!"

내가 보기에 젊은 처자들은 생장에서 다시 만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기차 안에서 이미 중년 부인에게 시달렸다는 듯!




바욘에서 생장가는 기차 내부


생장행 기치에 오른다. 안내하시는 분이 순례자들을 한 칸에 다 몰아 앉혔다.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넉넉하게 앉았다. 두 처자는 스페인어를 공부 중이라며 인사말과 감사 어를 발음하고 있었다. 그 사이, 중년 부인은 사진도 찍어주며 자신의 이야기도 수없이 쏟아부었다. 이걸 내가 왜 다 알아야 하나 싶은 개인사까지! 대부분 자랑이 깨지는 스토리였다. 그걸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미친 듯이 퍼붓는 질문! 징글징글하게 1시간 동안 나를 캐려는 듯 질문 세례! 은혜가 넘쳐서 내 기가 다 빨린 듯했다.  


생장에 내려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순례자 사무실까지 젊은 처자들 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도망가듯 가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이 마을에서 사무실 찾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중년 부인은 어느새 내 차지가 되었다. 고얀 것들! 왜 중년 부인을 나에게 남겨두고 가려는 건데!  중년 부인은 이제 젊은 처자들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는 태도였다. 애초부터 아니 태초부터, 나랑 오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내 옆에 딱 붙어있다.


생장 역


생장 평화로운 마을 전경


생장은 한 눈에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조금 걸어서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역시 비수기는 비수기인가 보다. 차례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크게 붙어있는 순례길 지도가 보였다. 아직 첫걸음도 못 뗀 아기가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 다 헤어릴 수 있으랴. 그저 실핏줄처럼 길게 이어진 그림일 뿐, 체감되지 않는 표식이다. 순례자 여권과 구간별 코스 표, 알베르게 정보를 받았다. 2유로에 가리비까지 총 4유로를 냈다.


생장 순례자 사무실 내부


생장 순례자 사무실 내부



친절한 봉사자들의 깊은 시선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미 예약해둔 사설 알베르게로 들어가기로 했다. 공립 알베르게는 여차하면 꽉 찬다고 해서 미리 예약을 해둔 곳이다. 평이 좋았지만 지금은 비수기 때문인지 사람도 거의 없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머물기로 한 숙소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공립을 먼저 가보겠단다. 성수기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들어갈 수 없겠지만 지금은 성수기도 아니니 가능할 수도 있을 거란다. 더군다나 우리가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사무실에서 등록을 하고 돌아봤을 때 젊은 처자들은 사라졌다. 먼저 갈게요, 라는 인사라도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도 어디에서 묵을 거냐고 물을까 봐 도망갔나 보다. 그 뒤로 어디에서도 그녀들을 볼 수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너희들은 나에게 중년 부인을 남겼어~!


젊은 시절에 여행할 때는 몰랐다. 왜 기성세대들이 쭈뼛거렸는지! 내가 그들 나이가 되어 보니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질 때 주저하게 된다. 그때 내가 열린 마음으로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더 살갑게 굴지 못한 게 마음에 남았다. 나름 친절하려고 했지만, 이국의 땅에서 수발들다 끝날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둔 적도 있었다. 헤어질 때 인사를 하고 도망이라도 갈라치면 그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진한 포옹을 하며 눈물 글썽이며 고맙다고 했던 말들, 한 번 붙들면 놔주지 않으려 했던 게 싫었는데, 이제 조금 이해가 될 듯하다.


외로웠고, 두려웠던 거였구나!


그랬다. 사실 젊지 않은 나이로 낯선 길에 서니 내가 꼭 그랬다.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으신 중년 부인은 더 그렇겠지! 나이가 주는 힘겨움은 어쩔 수 없다. 여행 패턴도 많이 달라졌다. 기기 문명에 기댈 수밖에 없는 오늘, 여행 좀 했다는 이들도 다시 배우는 심정으로 여행에 임해야 한다. 적응을 빨리 하든지,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아날로그적으로 갈 것인지, 그도 아니면? 디지털 인간들에게 빌붙어 가는 거? 제발 이것만은 하지 말자! 존재로서 똑바로 길 위에 서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가려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젊은 친구들, 젊다고 으스대지 말기를! 누구나 다 젊어 봤다. 마음에 없어도 마무리는 잘하며 살자.  

중년 부인, 꼰대처럼 살면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나 차게 들이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나 정도 사람도 그렇거든요. 타인에게 개인 질문도 쏟아붓지 마시길. 다들 부담스러워서 도망가요.

모두 함께 길을 걷는다. 늙고 젊고, 여자고 남자고, 길은 우리에게 똑같은 기회를 준다.   



숙소에서 바라본 생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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