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강성은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 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빛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셰익스피어)
죽고 싶었던 적이 있어? 하고 어느 날 삼각숲에 앉아 있던 체가 물었다. 나는 응 하고 대답했다. 근데 왜 안 죽었어? 하고 체가 다시 물었다. 킥킥. 너 이놈 내가 죽길 바라는구나. 나는 그렇게 눙쳤다. 그러면서. 합판을 짜서 만들어놓은 둥그런 식탁 위에 올라가 앉아있던 나는 허공에서 흔들흔들거리는 내 두 발등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나는 언젠가 그 두 발등을 본 적이 있었다.
겨울잠 자는 북극곰마냥 자다가 자다가 도저히 잠이 안 오는 깊은 새벽에 나는 벽에 매달린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이얼처럼 생겨서 꼭 어디든 보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다이얼 돌리는 시늉을 했다. 문득 내가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 불을 켰다. 빨간 빛이 원룸 방바닥에 끼쳤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던 나는 방 한 가운데에 둥둥 뜬 두 발등을 먼저 발견했다. 땡땡이 수면양말을 신은 두툼한 발등이었다. 그 위로 종아리와 무르팍, 허벅지 옆 두 손을 차례로 올려다보았다. 시커멓게 먼지 앉은 고무장갑 같은 손이었다. 물 찬 고무장갑. 손톱에 새빨간 칠이 되어 있었다.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 다음부터는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몸이 움직였다. 원하지도 않는데 고개가 저절로 위로 젖혀졌다. 그러자 그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화장실 빨간 불빛이 그 턱 언저리에 맺혀 있었다.
내 이름이 예언서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우습지만 그 사실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여러 퀘스트를 깨고 결국 정해진 엔딩을 보게 되는 주요 캐릭터가 아니었다. 나는 완전히 망할 수도 있었다. 인생 똥망. 당장 내가 하는 행동들이 뒤따르는 나를 만들게 되는데 당장의 나는 너무나 별 게 아니었다. 이 악순환이 매일매일 하루도 거름없이 지속되었다.
이제 막 스무살이었던 나는 체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의 머릿속과 내 머릿속에 떠 다니는 말들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입 밖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게 촌스럽게 느껴졌다. 대답을 원하는 체의 눈빛을 외면하고 나는 먼저 삼각숲을 빠져나왔다.
요즘도 가끔 그 때가 생각난다. 공룡 모양으로 깎아놓은 키 작은 가로수를 보면. 땅콩계단이 난 화단을 보면. 합판을 짜서 만든 식탁에 파라솔이 꽂힌 걸 보면. 오늘처럼 하늘이 순순히 파란 걸 보면.
누가 내 아픈 배를 좀 살살 문질러주고 바람 잘 부는 볕에 내놓고 말려줬으면 싶다. 뒤틀린 심사도 풀리고 잠도 깨게.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의 두 눈이 조금 무서울 때가 있었다. 살아 있는 눈이 아닌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지금 와서 시집을 읽어보니 그 때 내게 보여주었던 그 눈이 고맙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