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 이후에도 / 최승자
내 죽음 이후에도 新生 햇빛이 비친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 그것이 始源病이다
下立文字 하나 일어선다
지나간 것들은 다 잊어버려라
세계라고 말하지 마라
세계 위에 또 세계인
하늘이 있다고만 말하라
산 채로 제 죽음을 목도하는 이에게 죽음 이후는 선(善)일까? 시집을 덮은 뒤 든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엊그제 어느 강의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은 참이었다. 당신이 말할 때 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역자는 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물었고 강의를 들으러 와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디테일이 다를지 몰라도 큰 기조는 한 톤이지 않겠냐는 생각에 확신을 더하려는 듯이.
한 달 전부터 체는 나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늘상 고만고만한 시간대에 찾아와 늘상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체는 작은 체구와 깡마른 팔다리로 휘적휘적 조용히 들어와 말 없이 카드를 내밀고, 다시 내가 내민 카드를 받아가지고 늘상 앉는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내가 부르면 다시 휘적휘적 조용히 다가와 쟁반을 받아가지고 간다.
매너가 좋아 직원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던 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한 달 전쯤 수요일이었다. 그전날인 화요일에 나는 퇴근을 하고서도 집에 가지 않고 매장에 밍기적거리고 앉아 있었다. 말로는 읽을 책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기도 하고 그냥 집에 가기는 심심해서 마감 직원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맥주나 한 잔 하려는 참이었다. 그 때 체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홀에 앉아 있던 내가 일어나 반기자 체는 어쩐 일로 여적지 퇴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나는 웃으면서 뭐 그럴 일이 있다고 했다. 체는 마감 직원에게 다 같이 쓰라며 핸드크림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수요일에 매장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온 것이었다.
어릴 때 나는 만화영화를 하루 온종일 보고 앉아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둘리 만화의 한 장면이 유독 생생하게 생각난다. 둘리가 거실 식탁에 준비된 간식을 혼자서 다 먹어치운 뒤 고길동에게 쥐어터질 일이 두려워 발을 동동 구르던 장면. 그러다가 비누방울로 찐빵을 만들어 접시에 산을 쌓던 것.
엄마랑 연극을 보러 갔는데 관객이 너무 없어서 나는 둘리가 했던 것처럼 비누방울로 사람을 만들어 자리마다 앉혀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좋아하는 문학 시간에 엎어져 자는 애들을 퐁퐁 일으켜 앉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지금은 왜 아니겠냐만은 나는 정말 주관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상식에서 너무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이야기들이 남에게는 너무 낯설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라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도덕인 것이 너에게 호불호의 영역이라는 것이.
그게 내부의 도덕이라면 외부의 도덕이 또 있다. 내가 말할 때 말하는 도덕. 만약에 산다는 것이 외부의 도덕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그러면서도 아주 약간의 비틀기가 허용되는 것이라면 삶 이후는 선일까. 선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 정말로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끝난 것마냥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역시도 선일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됐건 세계 위에 또 세계인 하늘이 있고 그 위에 다시 또 세계인 다시 또 하늘이 있을 것이다. 보인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섭거나 이해되지 않아서 가기 싫기도 한 마음에 나는 아직도 여기 서 있는 것이겠거니 한다. 그래서 혐오하는 마음도 들고 불편한 마음도 드는 거겠지. 복잡한 중에 반가운 신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