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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Nov 03. 2018

레너드 코헨, 절대적인 간격

“Come over to the window, my little darling“이라고 흥얼거리며 환대의 미소를 짓다가도 곧바로 목소리를 높이고 ”Now so long, Marianne”이라며 작별을 고하고, “Every heart, every heart to love will come”라고 중얼거리다 문득 음정 없이 “But like a refugee“라고 냉정히 선고해버리고, ”I'll try to say, a little more”라고 힘주어 새로운 것을 말하는 듯 하나 결국 “Love itself was gone“라는 허무한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것은 어째서인가. 저 마초적인 애가 I'm Your Man의 가수인 레너드 코헨의 읊조림은, 그 자신의 대표적인 애가가 형성하는 무드와는 달리 많은 경우 착실히 자라나 다른 곳에까지 자신을 뻗치려는 사랑의 촉수를 냉정히 절단해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그의 목소리 안에선 부정한 것이 되고 그에 따라 노래 속 인물들은 서로에 대해 멀어진다. 그러나 코헨의 이런 절단의 제스쳐를 여타의 이별가들의 무드와 동류라고 생각하는 것은 게으르다 할 정도로 틀린 방식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무드란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단절되거나 그 대상을 그리워하는 데서 생성되는 부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간격의 문제이다. 여기서 ’그저’는 조금의 부정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과연 코헨 역시 부재의 심상을 노래하긴 했다. 예컨대 “Lover Lover Lover, come back to me”(Lover Lover Lover), 허나 그 모두가 이유도 결론도 없이 갑작스레 제시되고 결국엔 간격의 문제로 수렴되어, 사랑에 있어 간격의 문제가 부재의 문제를 대체하는 것을 지나쳐선 안 된다. 실제로 So Long, Marianne에서도, Lover Lover Lover에서도 Chelsea Hotel #2에서도 사랑하는 당신이란 그렇게 별안간 ‘멀어지지’ 않던가. 합일에 가까운 조우로서의 사랑만큼 코헨의 관심 바깥에 있는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코헨이 간격을 은유로 하여 완곡히 사랑을 부정했다 생각한다면 당신은 성급하게 담론을 앞지른 것이다. 상대에게 더 접근하고 더 나아가 하나가 되고자하는 사랑의 '친밀한' 촉수가 절단될 뿐, 사랑 자체가 그의 노래 안에서 부정되어 결별으로 나아간 적은 없다. True love leaves no traces의 코러스를 떠올려보라. "If you and I are one/It's lost in our embraces/Like stars against the sun" 여기서 우리는 코헨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보편적인 의미의 사랑, 합일에의 추구로서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유념하는 게 좋다. 혹은 In My Secret Life의 1절을 들여다보자. “I saw you this morning/you were moving so fast (...) And I miss you so much/There's no one in sight/And we're still making love“ 여기서의 마지막 연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너’는 이미 어디론가 서둘러 사라져 “누구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화자인 나는 “너를 그리워하”는데, 돌연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갑작스런 고백? 여기서 여전한 사랑은 대체 무엇이며, 이 비약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코헨이 다루는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간격의 문제가 개입하는데 - 이는 모반과 때 사이의 간격이기도 하고 배반자와 그녀의 고통 사이의 간격이기도 하다(Love Calls You By Your Name) - , 이 개입의 산물이 되는 담론이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닌 사랑의 불가능성, 사랑에 내재하는 불가결한 전제로서의 불가능성이다. 사랑의 문제는 언제나 둘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마련하고 간격의 문제는 둘 사이의 연결을 위태로울 만큼 벌려놓는다. 그러나 연결은 도중에 끊어지지 않고, 사랑은 오히려 그 벌려진 간격을 경유해 그 안에서 유대를 경험하고 감정을 나눈다. Famous Blue Raincoat의 화자가 수신자를 그리워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I guess that I miss you, I guess I forgive you“) 다름 아니라 수신자와 화자 사이에 편지를 통해야만 하는 거리, 즉 간격이 존재해서인 게다. 간격의 문제란 물리적인 거리에 그치지 않고 차이와 장애물로도 변이한다. Suzanne를 떠올려보면 코러스의 두 구절, “And you know that she's half-crazy/but that's why you want to be there”과 “And you want to travel with her/and you want to travel blind/And you know that she will trust you”에서도 변이된 간격의 문제가 비로소 사랑을 가능케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First We Take Manhattan에서 화자의 예상되는 승리에 대한 상대의 우려는 화자가 더 이상 패자가 아니게 되어, 사랑에 있어 더 이상 (장애로 변이한) 간격의 문제가 작동할 수 없게 되리란 예감에서 비롯한다(“you loved me as a loser/but now you're worried that I just might win“). 여기엔 어떤 냉소도 어떤 감상도 아닌, 아주 단순한 명제만이 작동하고 있다. 오직 간격만이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 사랑은 모험의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모험이라 해도 대단한 유산을 발굴한다는 등 상대의 자력에 이끌려 간격-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지닌 모험은 아닌것이, 그에게 간격은 해소되어야 할 갈망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불가결한 전제로서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친밀함을 버리고 떠나는 파국과 거기서 형성된 간격 사이 - 그 파국이란 것이 삼각관계부터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단적인 파국이란 점에서 그의 사랑은 바디우가 예찬하는 사랑의 가장 지독한 사례라 하겠다 - 에서 생성되는, 할렐루야를 작곡했던 낙심한 왕의 그것과도 같은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멜랑콜리가 모든 노래의 기반을 만든다. 그가 영원히 사랑하고 춤을 추자고 하는 대신 사랑의 끝까지 춤을 추자(”Dance me to the end of love“)라 속삭이며 굳이 ‘끝’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제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레너드 코헨의 사랑이란 무언가의 부재와 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불가능성에의 낭만이 아닌, 너와 나 사이의 심연과도 같은 간격에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수한 감정들의 운동이다. 코헨의 사랑이 모험과 같은 것이라면 이런 점에서 그러하다.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You ditch it all to stay alive")수 있는, 다시 말해 파국을 무릅쓰고 고유의 위험에 침잠하길 무한히 반복하는. 이 때 둘 사이에서 간격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근력은 어쩔 수 없이 그 간격의 아찔한 파국성에 의해 진동을 동반하는데, 이 진동이 곧 코헨 고유의 리토르넬로이다.



그 누구도 레너드 코헨처럼 노래한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레너드 코헨처럼 노래할 수 없다. 그가 눈에 띄게 개성적인 가창을 들려줘서가 아니다. 물론 당신은 코헨의 가창이 개성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개성적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확실히 그의 비릿한 비음, 불온한 저음, 음의 고저가 완만한 '읊조림' 등은 한 번 듣고 나면 뇌리에서 지우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허나 대다수의 청중들이 원하는 방식의 개성적인 가창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정서적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통제하거나 수동적으로 직시하는 두 가지 갈래로 나눠질 터. 과연 코헨이 그런 식으로 개성적이길 추구했던가? 앞에서 언급한 코헨 가창의 고유성들은 그의 보컬 전략을 시 낭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후자의 개성적 면모에 속한다고 착각하게끔 선동하기도 하지만 코헨의 방식은 감정에 가닿아 이에 일체화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저 고유성들을 경유해 '무개성적'이기 짝이 없게 노래하며 대상으로서의 정서의 강도를 악/약화해 어디에도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고 필사적으로 간격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의 간격과 진동은 코헨 개인의 가창에서 그의 음악의 전반적인 구조로 확산되는데, 그의 노래를 전반적으로 휘감으며 종종 코헨의 목소리보다도 진출하는 여성 보컬 코러스가 바로 확산의 결과-음악의 구조라는 좌표평면의 한 축을 형성한다. 


하나가 지극히 무개성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극히 개성적이다. 하나는 거칠고 깊은 음을,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섬세한 음을 하나가 우직하게 다른 하나가 유연하게 다룰 때, 전자가 코헨이 드러내는 남성성이라면 후자는 코러스들이 드러내는 여성성이다. 고전적 젠더 이분법에 천착한 이성애적 무드가 코헨의 간격이 구조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또 하나의 방식인 게다. 대답인 동시에 반향음이기도 한 코러스는 코헨의 가창(이 형성하는 진동)과 간격을 형성해 그 간격을 보다 견고히 하면서도 공명하고 상충하는 성질의 질료로서 기능하며, 이로 인해 형성되는 음성의 관능적인 대조법이 코헨의 세계에선 곧 간격이 되고 사랑이 된다. 관능적? 그렇다. 서로 다른 성질의 감각과 감각이 스스로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어 충돌하고 얽히며 서로의 활력을 끌어올릴 때 우리는 이를 관능적이라 일컫는 것이며, 그렇다면 레너드 코헨의 음악은 그 차이를 (가사의 영역에서) 한껏 벌리는 동시에 (화성의 영역에서) 힘껏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관능적인 것을 넘어 거의 음란하다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그 이전 혹은 그 이후에든, 이런 음란하기 짝이 없는 대조법의 가창에 비견할만한 음란함을 들려준 음악가는 What I'd Say의 레이 찰스나 Tame의 픽시즈말고는 존재할리 만무하다. 다만 코헨의 경우에는 그 음란함이란 것이 섹스의 광란이나 신경질적인 광기가 아닌 멜랑콜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음악가들의 작업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의 대표적인 애가인 I'm Your Man에서 여성 코러스가 언어화된 음성을 내뱉지 않는 이유가 이제 명백해졌다. 아무리 간격을 무시하고 상대에게 가닿으려 한들 이에 응답할 상대가 없다면 간격도 없고 사랑도 없어, 노래는 대화가 아닌 고독한 독백으로 남게 된다. 즉 I'm Your Man의 예외성은 외려 그 예외성에 의해 코헨의 멜랑콜리를 엄격히 내재한 산물로서 귀중함을 풍부하게 두르는 것이다. 레너드 코헨의 작업은 간격에서 비로소 진동하는 (불가능한) 사랑을 활성화하고 충돌시키고 연소시켜 멜랑콜리를 극대화하는 데에서 그 미적 활력을 얻는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에게 사랑이 조우인 동시에 별리이고 또한 그 사이의 틈새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고독한 진동이라면, 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역설적 조건들을 성립시키고야 마는 아슬아슬한 파동-평면이 바로 음악이다. 그것도 어떤 낭만이나 감각적인 효과의 창출을 주변화하며 정서와 감각들을 미끄러트리는, 건조하고 차가운 음의 장(場)으로서 음악. 마치 브랜디와 죽음의 숨결을 지닌 왈츠("This waltz (...) With its very own breath of brandy and Death")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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