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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문제로서 저작권」의 개정판을 발표하자면

by 그냥저냥 ㅏ랑 Mar 22. 2025


지난 해 《채널예스》 연재 칼럼 <써야지 뭐 어떡해>의 일환으로 발표했던 글 「미학의 문제로서 저작권」을 기억하시는가? 여기서 나는 "'논쟁을 위한 서설' 격으로, 근현대 예술사에서 저작권을 둘러싼 담론에 관해 흥미로운 두 가지 사례를 한 번 소개"해보았다. 한데 당시 지면의 한계로 인해 하고 싶었던 얘기보다 심도와 크기 모두를 축소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하여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런 마음을 알고 있던)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측에서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한민수의 걸작 『영화도둑일기』를 좀 더 중점에 둔 「미학의 문제로서 저작권」 개정판을 써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는 비평분과 측에서 발간하는 독립영화비평전문지 《독립영화》에서 공정이용과 저작권에 관한 특집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조금의 주저 없이 이를 승낙했고, 하여 먼저 발표했던 판본의 2배 정도 길이를 가진 개정판을 《독립영화》 54 싣게 되었다. 제목은 「『영화도둑일기』, 미학의 문제로서 저작권」으로 약간 바꾸고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이전 판본의 문장들을 가다듬는 것 뿐만 아니라 『영화도둑일기』가 왜 그토록 유효한 책인지, 또 카오스 라운지 사건을 어째서 세번째 사례로 추가했는지에 대해 쓰는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손을 댔다. 그런 만큼 저작권 담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실 당신께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자신해본다. (하지만 역시 분량과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대중음악에서의 사례를 추가로 다루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사실 나는 한민수와 가까운 사이인 만큼 정말 시급한 때가 오지 않는 이상 『영화도둑일기』에 대한 긴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그 다짐을 어기고 말았다. 한데 그것이 부끄러우면서도 후련한 건 어째서일까.




"1995년 인터넷의 완전한 상용화 이후 여기에 법적·사회적 제도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저작권의 기본 문제인) 작품의 활용에 있어 합법과 불법/기성과 대안/공유와 착취/보존과 훼손이 서로 분리 불가능한 수준으로 뒤얽히고 또 보충하는 인터넷 공간은 그런 시도를 계속 미꾸라지처럼 벗어난다. 당장 유튜브만 따져도 그렇지 않은가? 해적질이 엄연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면(혹은 그 사실이 이제야 수면 위에 드러났다면), 그것은 인터넷을 기반 삼은 디지털 문화경제가 그 근간에 있어 온라인 해적질과 긴밀한 유착 관계로써 구성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때로는 해적질의 의지를 자극하는 프로토콜을 퍼트리면서, 때로는 해적질을 통해 은밀하게 이익과 발판을 취하면서. 『영화도둑일기』는 그런 정세의 한 측면이 이 나라의 ‘해적왕’의 언어로써 (종종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육화된 모험적인 수기인 게다."


"한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작권이 창작자 개인으로부터 유리되는 게 반드시 나쁜 일일까? 보다 정확히,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통제력과 저작권이 일치하는 게 늘 당연한 일일까? 나는 지금 슈퍼맨과 배트맨에 있어 DC 코믹스가 지닌 지적재산권, 혹은 〈드래곤볼〉에 있어 버독같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들이 원작 만화의 세계관에 ‘역수입’된 것을 떠올리고 있다. 세월이 흘러 하나의 작품이 여러 미디어믹스로 확장 및 분열되면서 수용자들 사이에 지지를 얻던 파생작품에 대해, 저작권의 유리는 '원본'의 지위를 법적·상징적으로 상속하는 반전의 결과를 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럼으로서 캐릭터의 역량을 일찍 소진시킨 옐로우 키드의 사례와 달리 캐릭터(를 포함한 작품)의 역량을 갱신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저작권이 작가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리되었느냐일 테지만 말이다) 우리는 작품의 생명력과 작가의 생명력이 별개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차용하며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는 카오스 라운지(カオス*ラウンジ)의 사례다. 이는 본디 일본의 창작 그림 커뮤니티 사이트 픽시브(Pixiv)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화가 후지시로 우소가 주축이 되어 (당시에는 포스트 포퍼스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간간이 디지털 아트로 전시회에 참여하던 오타쿠 미술가들의 모임이었으나, 2010년 미술평론가 쿠로세 요헤이와 미술가 우메자와 카즈키가 여기에 가입하고 나아가 쿠로세가 대표가 되어 모임 방향을 주도하면서 곧 공격적인 동시대미술 콜렉티브로 바뀌었다. 이후 카오스 라운지는 인터넷 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활용해 팝 아트의 방법으로 오타쿠 콘텐츠를 탈구축하는 작업을 주로 발표했는데, 2011년경에 갑자기 연달아 추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신의 콜라주 아트를 픽시브와 (또 다른 창작 그림 커뮤니티 사이트인) 후타바 채널에 게재하던 우메자와 카즈키가 (늘 그랬듯이) 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업에 사용했다가 다른 오타쿠 유저들로부터 신고를 당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아'나 '창조' 같은 개념들을 해체하려는 급진적 시도들이 20세기 이래 미술사의 굵은 줄기였단 사실은 어느새 인가 '교양'의 영역에 들어섰다. 하나 한편으로 이 시도들은 (크레딧과 몸값을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본의 타율성에 의해 자꾸만 '자아'나 '창조'로 호명되거나 거기에 기대야 하는 딜레마에 노출되었으며, 나아가선 미술가(나 큐레이터)들이 직접 이 딜레마를 교활하게 활용해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가령 제프 쿤스의 추한 구상을 더욱 추한 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강판되는 조수들을 떠올려 보라) '자아'를 해체하기 위해 동원한 형식이 오히려 과잉된 '자아'를 창출하고 말았달까? 카오스 라운지의 사례가 대중과 동시대미술 사이의 간극이 충돌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저작권과 미술의 제도 사이의 불균형한 관계에 대한 역풍의 성격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23년 앤디 워홀의 프린스 초상화가 저작권 침해 판결을 받았듯, 그 역풍은 2010년대 이래 끊임없이 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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