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다른 사람들과 나는 같은 영화를 본 걸까? 몇 없는 한국어 감상평 중에 이 영화가 여성들의 연대를 다뤘다는 평이 즐비한 걸 보고 있자니 이런 당혹감을 감추기 힘들다. 왜냐하면 앤드류 부잘스키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다루는 문제는 다름 아니라 연대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듯 온갖 문제는 늘 개인의 바운더리 안으로 예기치 않게 침투해 들어오며, 인물들은 문제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살아가기 위해 번번히 타협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타협의 끝에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파국이다. 삶을 위한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라는 역설. 그 속에서 끝까지 함께 있는 것도, 끝까지 혼자인 것도 불가능한 인물들. 모든 이야기의 항이 끊임없이 '적당한' 궤도를 이탈해 새로운 궤도를 향하는 목적전도의 플롯. 영화 전반에 넘실거리는 이러한 아이러니들은 도덕적 선택을 추구하는 리사를 몰아붙이며여성들이 서로에 공감하는 연대로 충분히 구조를 돌파할 수 있다는 환상을 처참히 부숴버린다. 하지만 부잘스키는 한낱 냉소주의자가 아니다. 마지막 장면의 '즐거운' 비명은 이들이 환상이 부서진 자리에서 꾸준히 살아갈 것임을 역설하지 않던가? 더블 웨미를 지탱하던 '제도'에 균열이 생길 때 더블 웨미라는 공간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게 드러나듯, 모든 여성이 같고 그래서 서로에 공감할 수 있으리란 환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그것을 쇄신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지난 몇 년간 내가 제작에 참여했던 몇몇 '여성 영화'를 떠올려보았다. 현실을 상대로 하여튼 연대해서 이기(는 줄 알)거나 하여튼 불화해서 질 뿐인, 정치와는 하등 상관 없는 자기만족적 태도들. <그녀들을 도와줘>가 VOD로 나온 이후에도 페미니스트 커뮤니티 사이에서 잘 화자되지 않는 건 아마 영화가 끌어들이는 연대의 불가능성의 조건들이 그들이 바라는 연대('보돕보', 시스터후드)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영화의 옹호자들보다는 아예 보고 나서 침묵하는 이들이 영화의 핵심을 잘 간파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불가능성에의 직시 없이 가능할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인물들의 엔딩 이후 삶을 고민하고 써내려가야 하는 의무는 감독이 아닌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에게 있다. 이 의무를 마냥 저버리지 말자. <그녀들을 도와줘>는 <기생충>이나 <행복한 라짜로>같은 영화들 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첨예하고 근사하게 초현실(주의)적이며 중요한 페미니즘적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이다. 어차피 국내에서 흥행하긴 글렀으니 다음 작품이라도 (개봉할 수 있다면) 흥행할 수 있길 바란다.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The Dead Don't Die)
물론 이 영화는 별로 좋지 않다. 이전작 <패터슨>에서도 신경을 건드렸던 불쾌한 '유머'를 더 노골적으로 쓴다는 점에서도 -심지어 그게 크게 웃기지도 않는다- , 짐 자무쉬 특유의 섬세한 아마추어적 스타일이 여기서는 감각의 쇄신을 이끈다기 보다는 감각을 갈짝깔짝 건드리기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조지 A. 로메로 이후의) 흔해 빠진 좀비 영화의 매뉴얼을 고쳐 쓰고 싶었다기엔 너무 투박하지 않나?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는 명백한 실패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작가주의 프레임 안에서 충분히 옹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무쉬 본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스타들을 기용해서 우스꽝스럽고 멍청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진정 문제다운 문제란, 어째서 자무쉬가 굳이, 기어이 실패하길 선택했느냐에 있다.
사물이나 행위를 인터페이스 삼아 고정된 현실성을 점진적으로 뭉개버리는 영화, 앞에서 쓴 표현을 다시 쓰자면 "감각의 쇄신을 이"끄는 영화. 그것이 짐 자무쉬의 영화다. <미스테리 트레인>의 엘비스 프레슬리, <죽은 자>의 여정, <통제의 한계>의 반복되는 대사와 구도, <패터슨>의 시... 그런데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는 아예 이야기 설정 상에서 지구가 이상해졌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시작해버린다. 달리 말해 현실성은 러닝타임 속에서 뭉개지는 게 아니라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뭉개져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배우, 인물 구도, 장소, 와패니즈 등 자무쉬의 이전 작들의 여러 요소를 인용해 한 데 섞어놓은 컴필레이션 성격이 강하다. (아마 레딧에 검색하면 바로 인용 명단이 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마로서의 죽음.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는 자무쉬적인 기호들의 과잉으로만 이루어진 브리콜라주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리고 브리콜라주란 말이 암시하듯 자무쉬적인 기호들은 섬세하게 통제되지 않고 투박하게 섞여있으며, 종국엔 그 섞인 상태가 해결되기는 커녕 무지막지한 작위로 내던져진다. 그렇다면 영화의 명백한 실패는 '자무쉬적인 것'의 영토화에 저항하려는 의도의 산물이 아닐까? 어쩌면 자무쉬는 스스로를 쇄신하고자 해, 이전의 자신에 대한 "멍청한" 결산의 영화를 내놓은 게 아닐까? 이런 해석으로 나아간다면, 이 영화는 자무쉬의 가장 냉정한 영화 중 하나에 속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무쉬의 궤적에서 <죽은 자는 죽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위치를 점한다.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
꽤 심드렁하게 봤다. 심지어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하기 직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떤 얘기가 펼쳐질 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실제로 내가 상상한 그대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감독이 구사하는 미적 전략이 의미에 대해 너무 앞서간다는 점에서 (자제력이 부족한) 습작이라 할 수준의 작품인데다 -로르와커는 이미지가 낭비되는 걸 두려워 않는다기 보다는 자신이 다루는 이미지들이 낭비라는 생각을 못하는 듯 하다- 그 의미할 것에 깔려있는 계몽주의적 비관은 기분 나쁘기까지 하다.
특히 라짜로 일행이 교회에서 쫓겨나자 마자 교회 안에 흐르던 음악이 그 공간을 벗어나 라짜로 일행을 쫓는 장면에선 헛웃음이 나왔다. 민중에게 인색한 교회 대신 별 볼일 없는 민중에게 동조화된 미?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후기 자본주의가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세뇌가 아닌가? 그것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대체 무슨 정치를 다루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로르와커는 페드로 코스타에게 미적인 것의 정치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자크 랑시에르가 극찬했던) <행진하는 청춘>의 한 장면, 벤투라가 편지를 읊는 데서 시작해 미술관에서 쫓겨나는 일련의 시퀀스를 떠올리고 있다.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순간들.
...이 영화가 내게 흥미를 준다면 그건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찍는 데 쓰인 필름 때문이다. 탄크레디 역을 맡은 루카 키코바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님이 코닥의 남은 (16mm) 필름을 전부 구매했고, 우리가 촬영하는 게 마지막 필름이었다. 더 구할 수 없는 필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작업을 한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에서조차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게 불가능해지는구나 싶어 조금 슬퍼졌다.
엑시트
현대 한국(-도시)적인 재난이 뭔지 '너무' 잘 아는 영화. 한국적 기호가 여기저기서 넘쳐흐른다. 취업 문제, 높은 빌딩으로의 상승-도피, 텅 빈 차로 가득 찬 도로를 가득 메우는 전화벨 소리, 드론으로 생중계되는 재난, 아프리카 TV, 그리고 다시 세월호 트라우마.
드론이 떼로 나오는 씬 부터 영화가 작위적으로 흘러간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좀 있던데, 이는 '게임(성)으로 물든 도시'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PC방에서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드론 생중계로 눈을 돌리는 건 '무엇이 더 흥미로운 게임인가'라는 판단에 근거한 행동이란 것이다. 여기서 모바일 디바이스와 병원 TV와 옥외 전광판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뜀박질의 이미지를 두고도 '구경거리'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 건 드론이 그저 비행 중인 기계 시선일 뿐만 아니라 '극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물체이기 때문이다.
게임 중계를 비롯한 1인 방송이 공적 미디어 체계 안에 들어온 지 한참 됐다만, 모든 상황이 매체의 위계없이 펼쳐지는 '게임'(혹은 '콘텐츠')으로 치환됐다는 걸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든 찍을 수 있는) 드론의 시점부터 (지극히 게임적인) 단순한 갈등의 서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건 한국 상업 영화 중에선 이 영화가 처음인 듯 하다. 그 점에서 <엑시트> 옆에 반대항으로 놓여야하는 건 강정석의 <Simulating Surface> 연작이다.
<극한직업>이 이미지의 한국적 취합 방식을 전략으로 쓴 영화였다면 <엑시트>는 이미지의 한국적 유통 방식을 계열화한 영화라 할 만 하다. 아마 <엑시트>에 대해선 좀 더 길게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상승에의 열망을 팔루스가 어쩌니 하는 간단한 정신분석학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지구 최후의 밤(地球最後的夜晚)
그래, 왜들 그렇게 감탄하는지는 잘 알겠다. 타르코프스키, 린치, 허우 샤오시엔, 왕가위, 아핏차퐁 등 (시간의 뒤틀림을 다루는) 선배 감독들에 대한 애정 고백은 그저 몇 개의 숏을 따라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방법론의 차용수준으로 이루어져, 영화 전반에 흐르는 향수와 어우러지며 퍽 근사한 모양새를 띤다. 특히 물과 빛의 소리에 집중하는 순간은 홀린 듯 몽환적이다. 찰나임을 알지만 영원히 지연/속하고만 싶다는 영화관(觀)도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공사중)
스파이더맨: 집에서 멀리 떨어져(Spider-Man: Far From Home)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제목을 달리 쓴다면 "MCU의 승리선언" 정도가 될 게다. 후반부에 스파이더맨은 모든 진상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스테리오가 만든 괴물의 환상에 고전한다. 보고 있으면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한들 무의식적으로 속을 수 밖에 없다. 인지를 속일 수는 없어도 감각을 속일 수는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존재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누가 봐도 이건 (CG의) 지표성에 대한 코멘트다. 하지만 영화는 이 코멘트를 질문으로 변형시키는 대신 자신에게 적합한 제스처로 바꿔치기한다. 어떤 제스처? 눈을 감는 것. 스파이더맨은 환상에 눈을 감고 싸우는 것으로 대응하고, 그가 괴물의 환상을 지나쳐 드론을 부수자마자 순식간에 괴물의 이미지가 사라져버린다. 달리 말해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우리의 감각을 속이는 이미지는 무용해지거나 사라지고, 그것을 만든 기술적 토대만이 남는다. 이 때 이미지란 한낱 기술이 만든 신기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게 정확한 대응일까? 시각 문화의 역사와 작금의 대안적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진실과 거짓 사이의 역학을 모호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지표성의) 힘을, 존 와츠를 비롯한 MCU 관계자들은 다시 진실과 거짓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억지로 억제하여 부정적으로 쓴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진실은 진실과 거짓을 직감적으로가려내는 '피터 찌리릿'을 구사하는 스파이더맨의 쪽-즉 MCU에 있다. 물론 이렇게 이미지의 힘을 억제하는 방식은 100년이 넘는 영화사에서 수 많은 '주류 영화'가 안정적인 재현을 위해 써왔으니 그 자체로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미스테리오가 토니 스타크 밑에서 일하던 홀로그램 개발자였으며 지금은 제 2의 아이언맨을 꿈꾸는 사기꾼이란 설정을 떠올린다면, 이 영화에는 MCU를 더욱 견고하게 신화화하면서 자신의 가능할 아류를 미리 짓밟으려는, 유래를 찾기 힘든 냉소가 노골적으로 녹아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역겨운 영웅주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MCU는 이미지에 대해 무식한 게 아니라 영악하다. 점점 MCU가, 디즈니가 무서워진다.
일찍 죽기엔 너무 늙었다(Too Old to Die Young)
니콜라스 빈딩 레픈이 지금껏 뭘 하고 싶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혹은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걸 하기 위해선 드라마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드라이브>나 지나치게 과잉이었던 <네온 데몬>을 생각하면 그렇다. (레픈을 끔찍이도 싫어하던) 나 스스로도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하여튼 그렇다. 이야기를 억지로 멈춰세우고 이미지의 과장된, 그러나 껍데기 뿐인 레이어들이 내러티브를 뜯어먹게 하면서 '장식 예술'로서의 영화의 양태를 (<24 프레임>의 키아로스타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이 작품은, 작품의 방향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시네마'의 현재를 고민하는 데에 있어 꽤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올바른 서사와 주제와 연출 모두를 배반하는 말도 안 되는 괴작을, 그것도 TV 드라마로 만들어버린 데에서는 영화를 만들었던 이로서 느끼는 막연한 존중과 감동마저 나온다. 아직 전부 다 보지는 못했으니 조심스럽긴 하지만, 근 몇 년간 제작된 TV 드라마 중 <트윈 픽스: 귀환>과 함께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5화의 '감상적인' 카 체이스 씬은 분명히 <트윈 픽스: 귀환>을 따라한 것이다)
그리고 <라이온 킹>은 안 볼 것 같지만 궁금하다. 하지만 여기서의 궁금함이란 '레트로마니아'(수 많은 거대 제작사들이 새로운 이야기란 존재할 수 없다는 듯 자꾸만 리메이크를 지향한다는 것)나재현 담론(사람들이 같은 이야기, 같은 상황이라도 더 진보된 '것 같은' 것에 더 호응한다는 것)에 레퍼런스를 추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동물들에게서 성기가 떼어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곤충을 잘근잘근 십어먹는 걸 포함해 모든 걸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구현하려 한 CG 기술이 성기만을 구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는 이물감. 가령 심바는 마치 부모의 섹스 없이 태어난 것 같다. 섹스 없는 로맨스와 신화? 여기서 대타자의 존재를 상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대타자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정치적 올바름을 과잉으로 체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순결과 향유를 동시에 요구하려는 것인지. 아마 이는 영화를 봐야지만 알 수 있겠지만...